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황해도 봉산(鳳山) 사람이다. 향리에서 서당에 다니면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국가가 기울어 가는 것을 보고 개탄한 나머지 일본으로 유학길을 재촉하였다. 그는 1919년 2월 일본 동경(東京) 조도전대학(早稻田大學) 재학 때 최팔용(崔八鏞) 서춘(徐椿) 등과 함께 2 8 동경 한국인 남녀유학생의 독립선언에 막후 주요 인물로 참석하여 연락, 동지 규합, 문서 작성을 지원하였다. 이로 인해 체포되었으나 바로 석방된 후 곧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주소를 보창로(寶昌路) 보강리(寶康里)에 두고 선배 독립지사와 함께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것을 맹세한 뒤 임시정부 수립에 진력하였다. 우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서는 임시의정원이 선행 설립되어야 함을 역설하고 독립운동의 원로 이동녕(李東寧)을 임시의정원 의장에 선임하는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리고 그는 황해도 의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이리하여 1919년 4월 10일 임시정부 수립을 결의하고 동월 13일 정식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내외에 공포하게 되었다. 동년 5월에 상해 대한민국청년단이 조직되자 그는 서무부장에 임명되어 청년들의 민족정신 고취에 주력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뒤 미국으로부터 도산 안창호가 임정에 합류하는 등 활기를 띠게 되었는데, 그 첫째가 연통제와 교통국의 설치로 국내외를 통할 통치하는 것이며, 둘째는 독립운동의 사료(史料) 편찬이었다. 그 외 독립신문의 간행, 특별 선전대의 조직 등 8대 기본 전략을 수립하였다. 임시사료편찬회는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의 노력과 경륜에 따라 성립된 역사의식의 구체적인 표현이었다. 1919년 9월에 구성된 조직과 책임자는 다음과 같은데 그는 조역(助役)에 임명되었다. 총재 안창호(安昌浩) 주임 이광수(李光洙) 간사 김홍서(金弘敍) 위원 김병조(金秉祚) 김두봉(金枓奉) 등 8명 조역 김붕준(金朋濬) 김석황 외 19명 이들은 「한국독립운동사」와 「한일관계사료집」4권 등을 편찬하여 국제연맹에까지 보내 한국의 독립이 필연적인 사필귀정임을 역설, 호소하였다. 그해 8월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처음에는 「독립」이라 칭하였다)을 창간하기 위하여 직접 그 자신이 나서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개인소유의 600원(元)을 찬조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기관지로 독립신문을 창간, 국내외에 이를 널리 배포하면서 임시정부의 민주공화제로서의 정치의식을 높이고 민족독립운동의 통제적 사명을 스스로 담당하고 나섰다. 1919년 11월에는 고향인 황해도 봉산 지역의 조사원으로 임명받아 임시정부의 명령이 있기만 하면 즉시 국내를 왕래하게 되었다. 1919년 10월 중에는 독립신문의 비용을 모집하기 위해서 국내에 들어와 대동군 추을미면 이천리(秋乙美面梨川里)의 김창빈(金昌彬), 진남포 후포리(後浦里)의 안기영(安基永), 미내등(美奈登) 상회의 김인수(金仁洙)에게 독립신문 자금 모집의 신임장을 교부하고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독립신문 평남지국장에 평양시 장별리(將別里)의 박순도(朴順道)를 임명하였다. 동년 11월경 황해도 안악(安岳)의 최일(崔日)로부터 독립운동자금 2천원을 제공받아 다시 상해로 건너갔다. 이후 김구(金九) 윤현진(尹顯振) 손정도(孫貞道) 김순애(金淳愛) 등과 상의하여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고, 국내 각지에 그 지단 및 분단을 설치하기 위해서 다시 입국하였다. 평양에 들어와 기홀(紀笏) 병원에서 입원 치료 중인 것으로 위장하고 동지 황중극(黃中極) 홍석운(洪錫雲) 등 10여 명을 병원으로 초치하여 의용단 지단을 조직하였는데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서울지부장 황중극(黃中極) 평원군 한천(漢川) 지부장 최윤팔(崔允八) 중화(中和)군 지부장 임세환(林世煥) 순천(順天)군 지부장 노기순(盧基淳) 성천(成川)군 지부장 한준항(韓俊恒) 수안(遂安)군 지부장 허성섭(許成燮) 강동(江東)군 지부장 이수영(李秀英) 삼등(三登)지부장 백인덕(白仁德) 지단(支團) 조직 후 1920년 5월 하순경 그는 독립운동 자금 1천여 원을 모금하여 세 번째 상해로 도항하였다. 상해에서는 김성근(金聲根)이 조직한 구국모험단(救國冒險團)을 의용단에 가입시켰으며, 그들이 제조한 폭탄을 동년 6월 임득산(林得山)에게 휴대시켜 안동의 이륭양행(怡隆洋行)을 거쳐 국내 각 지단으로 송달하였다. 또한 광복군 총영의 결사대로 국내에 파견되어 평양경찰부 등에 폭탄을 던진 동지들의 거사에도 적극적으로 협조하였으며, 국내에 조직된 지단원들도 많은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20년 7월 그가 상해로부터 국내 지단원에게 부친 편지가 일경에게 탐지되자 일경은 상해에 있는 밀정을 통하여 그의 행방을 추적하도록 지령하게 되었으며, 9월 4일 상해를 출발하여 만주 봉천(奉天)으로 간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다. 이에 일경 아부(阿部) 경부 등이 만주로 급파되어 그를 추적하게 되었으며, 9월 16일 탑만촌의 한국인 가옥에서 일경과 격투 끝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결국 1920년 12월 22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에는 건국 준비 과정에서 장덕수(張德秀)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미(美) 군정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6.25 당시 옥사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78・210・242・339・345・359・364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22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25・32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15・33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108・445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429・452・467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42・43・54・55・152・158면
-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51・59・60・68・73・91・103면
- 기려수필 29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73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67・201・202・203・303・416・46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288・461・67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30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12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25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97・98・100・101・102・103・104・10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468・469・961면
- 조선민족운동연감 6・23・31・43・6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