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1929년 11월 이래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파급되면서 학생운동이 일어나자, 1930년 1월 평양 숭실전문학교 학생 채정근(蔡廷根) 등과 평안남도(平安南道) 용강군(龍岡郡) 서화면(瑞和面) 죽목리(竹木里)의 신흥학교(新興學校) 교사 이능상(李能相) 등과 함께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는 격문을 제작 배포하고 만세사건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1월 18일에는 「3천 평양 남녀학생 제군에게」, 「X는 끓는다」 등의 격문, 1월 22일에는 「제국주의를 XX하라」 등의 격문을 평양시내와 인근의 9개 학교에 배부하였다. 또한 1월 18일 대동강(大同江)에서 열린 전조선빙상경기대회(全朝鮮氷上競技大會)에 참여한 학생들의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1월 22일에는 숭실전문학교 등 평양시내 각 학교에서 학생 수천 명이 궐기하였다.
이와 같은 ‘평양학생 만세사건’으로 인해 일본 경찰에 195명이 검거되었다. 다수의 학생들은 며칠간 취조를 받고 석방되었으나, 주도자 10여 명은 2월 6일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송치되었다. 그런데 당시 김양선을 비롯한 강한식(姜寒食)·김봉덕(金鳳德) 등 3인은 도피하여 체포되지 않았으므로 기소중지 처분을 받았다. 이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는지 여부나 그 시기 등은 불분명하나, 같은 해 7월 24일 평양지방법원(平壤地方法院)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및 출판법 위반’으로 금고(禁錮) 3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30년대 후반 전시체제기 하에서 신사참배(神社參拜) 거부운동을 주도하여, 1940년 11월 21일 평양경찰서에 검속되었다가 11월 23일 풀려나는 등 구금을 당하였다.
또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이후에는 예비검속 대상이 되었다.
정부는 2017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신분장지문원지(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 신분장지문조회 회보(내무부 치안본부, 1981. 9. 28)
- 동아일보(東亞日報)(1930. 2. 6, 2. 16, 2. 19, 2. 21)
- 중외일보(中外日報)(1930. 2. 6, 2. 7, 2. 19, 3. 12, 3. 14, 5. 9)
- 조선일보(朝鮮日報)(1930. 3. 13)
- 사상월보(思想月報) 제1권 제6호(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 1931. 9)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9권 613~614면
- 광주학생독립운동사(광주학생독립운동동지회, 1974) 573~574면
- 숭실대학교 100년사(100년사편찬위원회, 1999) 475~482면
- 한국기독교 사학자 김양선(유영렬 엮음, 숭실대학교, 2001) 38~4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