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안창식의 본은 순흥(順興)이니 문성공 유(文成公 裕)의 후예로서 대대로 홍주의 남쪽에 위치한 청양 화성(靑陽化城)에서 살면서 문학을 전업으로 삼았다.
그는 형체가 장대하고 기개가 고상하며 침착하고 강개하여 초야에 묻혀 있으면서도 나라 일을 걱정해 왔다. 그의 이러한 성품이 병찬(炳燦)·병림(炳琳) 두 아들을 의병운동에 투신할 수 있게 하였다.
그는 특히 박영효(朴泳孝) 등의 개화운동의 반민족적 측면을 우려하여서 1895년 여름부터 비밀히 거의(擧義)할 뜻을 두고서 한두 사람의 동지와 함께 광호(廣湖) 등지로 가서 저자 사람을 앞세워 먼저 일어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이른바 홍주의진의 선구자들인 박창로(朴昌魯)·이봉학(李鳳學)·이세영(李世永)·정제기(鄭濟驥)·송병직(宋秉稷)·조병고(趙秉皐)·김정하(金正河) 등과 더불어 가만히 서로 왕래하면서 긴밀한 연락을 하고 있었다.
이즈음 아들 안병찬(安炳燦)이 전 승지(承旨) 김복한(金福漢)·전 승지(承旨) 이설(李偰)과 함께 구체적으로 거사 계획을 세우고 1895년 12월 1일 홍주성으로 입성할 계획을 세우고 찾아왔다.
마침 안창식은 그 고을 사람인 채광묵(蔡光默)과 더불어 180명의 민병을 모집해 놓고 있었다. 그는 아들에게 그 군사를 내놓아 채광묵과 함께 원통한 사정을 하소연한다고 핑계하고 관문(官門)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이날이 11월 29일 홍주의진의 첫 입성이었다.
화성(化城) 의병의 입성을 계기로 여러 의병장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속속 홍주로 들어왔다. 이러한 의병의 기세에 눌려 관찰사(觀察使) 이승우(李勝宇)가 '홍주목사 겸 창의대장'이 되어 각지로 격문을 돌렸다.
그러나 끝내 이승우의 배반으로 12월 4일 성안에 있던 의진의 수뇌부가 모두 체포되었다. 이때 아들 안병찬도 체포되었다.
집에 있다가 이 소식을 접한 안창식은 분함을 참지 못하고 홍주로 들어가려 하였으나 친구들의 만류로 중도에서 돌아왔다. 다시 향병(鄕兵)을 모집하여 승우를 토벌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2월 20일 안창식은 을사 홍주의거와 관련되어서 체포되었다. 심문 받을 때 창식은
"30년 동안 군림하신 국모(國母)가 적당에게 시해를 당하셨는데 도리어 원수를 갚으려는 자를 역적이라고 한다면 국모를 시해한 자는 마침내 충신이란 말이냐.
시골의 미천한 자가 혹시 높고 귀한 이의 상투나 수염을 움켜잡아도 오히려 패악무도한 자라 이르는데,
하물며 임금님의 머리를 강제로 깎는 자이랴.
도리어 역적을 토벌하는 사람을 역적으로 만든다면 임금님의 머리를 강제로 깎는 자가 마침내 충신이란 말이냐."
라고 항의하였으며, 한사코 뜻을 번복하지 않았다.
1896년 정초에 두 부자와 의진 관련자들 23명이 모두 서울 법부로 압송되었으나 도중에 안창식은 연로하여 일찍이 고향으로 돌려보내어졌으며, 아들 병찬은 재판에 회부되어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고종의 특지(特旨)로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기려수필 5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17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2권 259∼266·272·273·275·28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