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경상북도 김천(金泉) 사람이다.
1919년 3월부터 5월에 걸쳐서 대구(大邱)와 김천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그는 당시 대구 계성중학교(啓聖中學校) 학생으로서, 3월 8일의 대구 서문(西門) 장날을 이용하여 계성중학교·대구고등보통학교·성경학교(聖經學校)·신명여학교(信明女學校)를 중심으로 한 1천여명의 시위학생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킨 주모자의 한 사람이다.
이날 밤에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김천으로 피신한 그는, 이튿날 김천교회 교사인 김충한(金忠漢)을 찾아가 대구의 독립만세시위 소식을 전하고, 김천 장날인 11일을 이용하여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김충한과 함께 군민의 궐기를 북돋우기 위하여 경고문을 기초하여, 2백여매를 등사하고, 수십매의 태극기를 제작하였으나 일이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3월 중순에는 김천군 개령면(開寧面)으로 가서 그곳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고 다시 대구로 돌아온 후 하숙집에서 이영식(李永植)·허성도(許聖徒)·이기명(李基明)·이종식(李鍾植) 등과 만나, 대구 시내의 조선 상인들에게 상점 철시와 일본인과의 거래를 끊도록 종용하기로 결의하고, 경고문(警告文) 3백여매를 등사하여 시내 요소와 서문 장터에 배부한 결과 80여호가 자진하여 폐점 철시를 단행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6일에는 대구경찰서장에게 경고문을 우송하고 3월 8일의 독립만세시위에 많은 시위군중을 잡아가둔데 대하여 항의하며, 서장을 암살하겠다고 경고하는 한편 조선 장인들에게 폐점할 것을 촉구하는 경고문 제2호 4백여매를 등사하여 시내요소에 배부하였다.
4월 7일에는 다음날 아침부터 일제히 폐점 철시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는 경고문 제3호 3백여매를 등사하여 시내상가에 배부하였다.
그리고 4월 13일에는 일제가 친일파를 앞세워 자제회(自制會)라는 것을 설립하여 많은 조선인을 가입시켜 독립운동을 차단하려고 획책함에 분개하여, 자제회 설립에 앞장섰던 친일파 거두인 중추원 참의(中樞院參議) 박중양(朴重陽)과 구장(區長) 백응훈(白應勳)에게 암살 경고장을 우송하여 민족적 양심의 각성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또한 4월 17일에는 독립운동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이종식과 함께 혜성단(慧星團)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본부와 지부를 두었을 때, 그는 출판 인쇄업무를 담당 활동하였으며, 이튿날 달성군 달서면 내당동(達城郡達西面內塘洞) 방명원(方明園)의 집에서 동지들과 만나, 조선인의 궐기를 촉구하는 「근고동포(謹告同胞)」라는 제목의 격문 3백여매를 등사하여 시내 요소에 배부하였다.
4월 27일에는 다시 폐점 철시와 일본인과의 거래 중지, 일화의 배척을 주장하는 「경아동포(警我同胞)」라는 격문 3백여매를 등사·배포하고, 5월 7일에는 조선인 관공리의 각성과 독립운동에 참가를 촉구하는 「경고관공리동포(警告官公吏同胞)」라는 제목의 격문 2백여매를 등사하여 도내 각 군수를 비롯하여 군청서기·면서기에게 우송하여 민족적 양심을 일깨우기도 하였다.
또한 5월 14일에는 다시 조선인으로서 일제 관공서에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격문을 발송하고, 조선인 상인들에게는 폐점을 강요하는 격문을 배포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계속하다가 결국 체포되었다.
그는 이해 10월 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272면
- 고등경찰요사 186·18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352·356·45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446∼145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