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1권(2014년 발간)
허채는 1919년 3월 함북 성진군(城津郡)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성진군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0일을 시작으로 다음날에도 이어졌다. 3월 11일 김학천(金學天) 등 천도교도 3명이 방동(防洞, 학동면 면사무소 소재지)에 사는 강도희(姜道熙)를 찾아갔다. 그들은 강도희로 하여금 동민 유지들을 불러오게 한 다음, 이들에게 전국 각지의 시위상황을 보도한 <매일신보>와 면사무소에서 등사한 <독립신문>제2호와 안변의 독립 선언서를 토대로 하여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배부하고, 동민들의 궐기를 촉구하도록 부탁하였다. 여기에 참석하였던 허채, 김홍종(金洪鍾), 유명식(劉命寔) 등 30여 명은 11일 밤 방동 면사무소 부근에서 시위를 벌였다. 다음 날인 3월 12일 아침, 학동 면장은 각 구장을 불러 시위를 엄금하도록 힘쓰라고 하였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학동면 허씨 문중에서는 12, 13일 양일간에 걸쳐 각 마을을 돌아다니며 만세를 불러, 여기저기서 20~30명 규모의 소집회와 시위가 벌어졌다. 14일 오후에는 한동(閑洞), 방동, 용호동(龍湖洞) 및 동흥동(東興洞)에서 각각 10~30명의 만세시위가 있었다. 특히 학동면 하천(荷川)에서는 14일 밤, 김홍종, 유명식, 허채 등이 동민 200여 명을 이끌고 인근 산 위에 올라가 종과 북을 치면서 만세를 고창하였다. 이들이 밤늦도록 시위를 계속하자, 하천헌병주재소 헌병들은 성진경찰대의 지원을 얻어 이들을 해산시켰다. 여기에서 김학천 등 5명은 체포되고 김홍종, 강도희 등은 몸을 피하였다. 성진 읍내에서의 시위는 연쇄적으로 읍을 둘러싸고 있는 학성면에 번졌다. 12일 오후 2시경 학성면 주민 약 2백 50명은 산 위에 올라가 태극기를 휘두르며 만세를 불렀다. 또한 허채는 1921년 11월에 워싱턴에서 열리는 태평양회의에 제출할 한국인의 호소문에 성진군 대표로서 이름을 올리기도 하였다.
시위 후 체포된 허채는 1919년 6월 28일 소위 소요·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공소하여 9월 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았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10월 11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刑事控訴事件簿
- 韓國人民致太平洋會議書(독립기념관 소장)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제2권 762~770면
- 判決文(高等法院:1919. 10.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