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6권(2021년 발간)
1919년 3월 14일 함경남도 장진군 신남면 고토리(古土里) 시장, 헌병주재소에서 한영태(韓永泰) 등이 주도한 3.1운동에 참여했다.
3월 14일 오후 4시경 고토리 시장에서 신남면 중흥리(中興里) 한영태・한면각(韓冕珏)・윤복민(尹福民) 등이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신하리(新下里) 이익현(李益鉉)도 독립선언서를 가져와서 군중에게 참여를 독려했다. 이에 신흥리(新興里)・신상리(新上里)・만풍리(萬豐里) 등 7개 마을의 주민 약 200명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중흥리의 한후만은 김양수(金亮洙)・김정순(金正淳)・최안재(崔安在) 등과 함께 이에 참여했다. 조희창(曺喜昌)・한창순(韓昌順)・이우승(李愚昇) 등은 시위 군중과 구한국기를 앞세우고 고토리헌병주재소로 가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부 군중은 함흥–장진 간 전화선을 절단하고 주재소에 유치 중인 노석규(魯錫奎)의 석방을 요구했다. 한계연(韓啓淵) 등 20여 명은 주재소 구내에 들어가 사무실과 숙소를 파괴하고 서류와 물품 등을 밖으로 내던져 불태웠다. 시위 군중을 제지하기 위한 헌병들의 발포로 한규문(韓奎文) 등이 순국했다. 또한 뒤이어 출동한 하갈우리(下碣隅里) 헌병들의 발포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한후만은 만세운동 참가로 고토리헌병주재소 헌병에 체포되어 1919년 4월 21일 (장진헌병분대에) 구류되었다. 같은 해 6월 30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선고받고 공소를 제기했다. 8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 취소로 징역 8월을 선고받아 상고하였다. 그러나 10월 25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을 선고받아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2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고등법원:1919. 10. 25)
- 함흥지방법원 이시카와검사의 3.1운동 관련자 조사 자료(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9) Ⅰ・Ⅱ 112, 113, 274, 275, 286, 28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