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6권(2021년 발간)
1920년 7월 26일 조선노동공제회 황주지회 발회식에서 지회장으로 선출됐다. 또한 8월경에는 황주청년회와 장로교 대성청년회(大成靑年會)가 합병되면서 고문으로 선출돼 활동했다. 또한 국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독립단군감으로 활동하며 동지를 규합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데 지원했다. 당시 일제는 이재중을 “독립공채모집에 분주하고 무력적 운동을 일으킬 계획 하에 조직된 지분단(支分團) 설치를 하고, 조선독립을 달성코자 정치를 변혁할 목적 아래 단결을 하고 안녕질서를 문란하게 하여 총독정치의 파괴를 기약하고자 한 자”라고 보았다.
1923년 3월 황주청년회를 중심으로 한 물산장려회 조직에 참여했으며 6월부터는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참여했다. 이재중은 청중에게 “사회의 성쇠와 민족의 흥망이 교육의 진퇴와 산업의 소장(消長)에 관련한 것은 사실이 증명하는 바임을 우리는 친히 경험한 바다. 우리의 생존을 확충하며 그 발달을 도모하기 위하여”와 같은 취지의 연설을 했다. 그런 한편 황해도교육회 집행위원으로 선출돼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1928년 1월 2일 신간회 황주지회가 설립될 때 임시의장이 됐다. 이재중은 제반 사항과 함께 1월 28일 설립대회 개최를 결의하는 데 중심적 역할을 했다. 또한 신간회 황주지회장에 선출되고 동시에 신간회 서울대회 대표위원이 됐다.
이재중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1920년 10월 15일경 황해도 겸이포경찰서(兼二浦警察署)에 체포됐다. 10월 30일 평양지방법원(平壤地方法院) 검사국(檢事局)으로 이송됐다. 이후 황주지역 각계 단체들의 임원을 역임하며 지역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던 중 1928년 2월 이동오(李東旿)가 ‘제3 공산당 사건’ 관계로 투옥되자 이에 연루돼 체포됐다.
정부는 2020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동아일보(東亞日報)(1920. 7. 30, 8. 7, 9. 2, 1923. 3. 24, 6. 7, 12. 23, 12. 26, 1925. 1. 26, 1928. 1. 7, 2. 1, 3. 28, 5. 9, 1929. 1. 13)
- 중외일보(中外日報)(1928. 1. 11, 10. 21, 10. 25, 1930. 3.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