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평남 평양(平壤) 사람이다.
경술국치 이후 1913년까지 평양 대성학교(大成學校)에 재학하고 있었는데, 그 무렵에는 평안도 출신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많은 독립지사들이 중국본토, 노령 만주, 미주 등으로 망명하였다. 이들은 국제정세의 변동을 살피며, 동지 규합과 교포지도 또는 간민 이식(墾民移植) 운동 등을 전개하고 무장 군사활동도 준비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만주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는 평안남북도와는 가까운 지대이었을 뿐만 아니라 망명 지사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면서 간민 이식사업과 무장 군사투쟁을 아울러 준비하는 고장이었다.
그러므로 국내 청년들의 이곳 방문은 이 당시에 상당히 빈번하였다. 그들은 여기를 찾아와서 선배 지사들이 진행하고 있는 사업에 참여 합세하기도 하고 또 그들의 지도를 받고 귀국하여 민중 가운데 잠복해 있기도 하였다.
평양 대성학교를 졸업한 그는 김찬종(金燦鍾) 김봉기(金鳳基) 등과 함께 국권회복을 도모할 목적으로 다른 동지들 3, 4명과 협의하고 청년들을 다수 모집하여 유하현 삼원보에서 이회영(李會榮) 이시영(李始榮) 형제가 설립 경영하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 보내고 있다가 1914년 3월에 평양경찰서에 검거되어 소위 보안법 위반의 죄명으로 옥고를 치렀다고 한다.
석방 후 만주(滿洲)로 망명하였으며, 1918년 9월에는 북경(北京)에서 김규식(金奎植) 등 애국동지들과 함께 파리평화회의(巴里平和會議)에 우리나라 대표를 보내어 독립을 청원키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결정에 따라 대표로 선발되었으나 손병희(孫秉熙)·여운형(呂運亨)·장덕수(張德秀)·최 린(崔麟)·이 탁(李 ) 등과 협의한 결과, 1919년 12월에 김규식(金奎植)을 대표로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그는 김규식과 함께 1919년 2월 1일에 대한청년당(大韓靑年黨)을 조직하여 그 단장에 선출되어 항일 투쟁에 앞장섰다.
1922년 7월에는 평양에서 김동원(金東元)·조명식(趙明植)·김성업(金性業) 등 흥사단계의 인물들로서 구성된 동우구락부라는 민족단체를 조직하여 항일독립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동우회는 미국 상항(桑港)에 본부를 둔 흥사단의 한국지부로서 1914년 5월 도미 중인 안창호(安昌浩)가 민족의 독립을 획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재미한인을 규합하여 조직한 단체였다. 이들의 목표는 한국의 독립쟁취는 우선 당장 폭력투쟁으로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실력배양을 철저히 기하여 각계의 민족 의식을 발전시켜 공고한 단결을 실현시키자는 것이었다.
그 뒤 이광수(李光洙)는 상해(上海) 체제 중 안창호로부터 흥사단의 한국지부 조직 사명을 받고 1921년 귀국하여 1922년 2월 11일 표면상으로는 청년 남녀의 수양기관이라 하고 서울에서 김진덕(金鎭悳)·박현환(朴賢煥)·김윤경(金允經)·강창기(姜昌基) 등과 동지를 규합하여 수양동맹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따라서 1926년에 이 두 단체를 규합하여 회명을 수양동우회라 개칭한 후 항일 독립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 단체가 흥사단의 지부인 것이 탄로남에 따라 이 단체는 해체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만주 간도 연길현(滿洲間島延吉縣)으로 피신하였다가 그 뒤 천진(天津)에서 농장을 개척하여 한국인 약 200세대를 입주케하고 자위대를 설치하여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35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188·189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33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60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