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05년
3.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경북 안동 임동 고천 출신이다.
그는 24세 약관의 나이에 1차 의병전쟁에 참여하여 권세연(權世淵)의 막하에서 활약하였으며, 2차 의병전쟁 때에는 경주에서 거의하여 대장으로 추대받고 영만 동북부에서 활약한 인물이다. 조선 세종조의 명신 의손(義孫)의 후예이며, 그의 선조 중 유복기(柳復起)는 선조 임진년에 의병을 일으켜 곽재우(郭再祐) 의병장을 따라서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회맹(會盟)한 다음 싸움터에서 공을 세웠다. 이로부터 5대를 계속해서 국자생(國子生)으로 뽑혔으며 대마다 유림 중에 인망이 있어 영남의 현족(顯族)이 되어 안동 수곡의 대평 마을에서 대대로 살아왔다고 전한다.
어렸을 때부터 용맹하고 담력이 있었던 그는 전사(戰史)와 병서(兵書) 읽기를 좋아하였으며, 성장하여서는 국가의 형세가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깨닫고 탄식하여 이르기를, "바야흐로 집안과 나라가 위태롭고 망하게 된 시기에 있어서 어찌 책장만 뒤적이고 글 이야기만 하는 말단의 일에 국한하겠느냐· 오늘날의 급선무는 시대에 순응해서 현실로 써나가는 데에 있는 것이다." 하며 부국강병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그리하여 수레바퀴와 두레박을 만들기도 하고, 활·창·화약 등속을 만들기도 하였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나자, "외국의 도적이 돌입해서 국내에 변고가 이다지 크게 되니 우리들이 밥 먹고 옷 입고 앉아서 구차하게 살기만 하려 한다면 어찌 나라에 사람이 있다 하겠느냐·" 하며 분연히 떨쳐 일어나 군사를 일으켰다.
이때에 그 지방에서 명망이 있던 권세연(權世淵)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류시연은 선봉장이 되었다. 매우 용맹하여서 그 일대에서 류선봉(柳先鋒)의 이름을 모르는 아이가 없을 정도이었다. 그 즈음, 광주산성 전투로 이름 높은 김하락(金河洛)의 이천의진(利川義陣)이 관군에 쫓겨 단양·풍기·영천·경주 등지를 거쳐 안동 지역에 이르렀다. 1896년 5월 29일 류시연은 그와 합진하고자 하여 6개 부대를 이끌고 찾아간 바 있었으나 김하락 의진은 이미 패색이 짙어 있었다. 그리고 관군 삼백여 명이 수륙으로 육박해 오고 있어 영덕(盈德)의 신돌석(申乭錫) 의진이 매우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에 김하락이 함께 영덕을 구하러 가자고 청하였다. 그러나 류시연은 그 시점에서 관군과 정면충돌은 삼가는 것이 옳은 것으로 판단하였다. 당시 류시연은 약관 24세이었고, 김하락은 40여 세의 장년의 역전 노장이 되어 있었다. 또한 김하락은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김하락 의진은 그 직전 5월 중순에 있었던 경주에서의 전투에서 모든 무기와 군수물자를 적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류시연으로부터 무기를 인계받았다. 그러나 김하락은 나흘 후 그 전투에서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류시연은 승산 없는 불필요한 전투보다는 훗일을 기약하려 김하락과 연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해 유달리 길었던 장마 때문에 전국의 의병진은 크게 타격을 받았다. 그로써 1차 의병전쟁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그 후에도 은밀히 조카되는 창식(昌植)·인식(寅植) 그리고 이현규(李鉉奎)·신돌석(申乭錫) 등과 뜻을 모으고 있었다. 결국 온 국내의 인물을 찾아 아전·장사치·승려·순사·거지·종을 가리지 않고 한 가지 재주라도 있는 사람을 보면 밥을 주고 옷을 입히면서 주변에 불러 모았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류시연은 다시금 분연히 떨쳐 일어나 소모장(召募將)이 되어 동지를 규합하여 갔다. 1906년 봄 경주 분황사(芬皇寺)에서 열읍 의병장들과 회맹하고 총대장(영남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이리하여 진보(眞寶)·영덕(盈德) 등지에서 전투를 벌였다. 1907년 군대 해산 후 호서와 영남 중간에서 활약하던 이강년(李康秊)이 격서를 보내어 서로 손을 잡고 일하자고 요청해 왔다. 류시연은 군사 수십 명만을 이끌고 약속한 삼척(三陟) 방면으로 가서 만나 보기로 하였다. 이때 친일파로서 일본의 주구 노릇을 하던 박두일(朴斗日 혹은 朴斗榮)이 삼남토벌대장(三南討伐大將)이 되어 경북 일대를 유린하고 있었다. 이에 류시연의 본지 군졸들은 스스로 흩어지고 말았다. 이 소문을 들은 류시연은 본거지를 잃고 관동과 영남 중간 지대에서 머물러 있다가 울진 십이령(蔚珍十二領 혹은 삼척 십이령이라고도 함)에서 박두일을 사살하고 이어서 영양·청송·안동 등지에서 그의 능숙하고 독특한 유격전으로 적에게 타격을 주어 큰 전과를 올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 전투 중에 그의 행적이 적에게 노출되었다. 곧 방이 붙여지고 그에게 현상금이 걸리게 되자 행동에 제약이 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도록 적에게 체포되지 않은 것은 그의 노련한 변장술 덕분이었다고 한다. 그 일례를 들면, 그는 항상 보따리를 등에 지고 다니는데 밀정이 그를 잡으려 뒤따르면 산모퉁이를 돌아 밀정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급히 보따리 속에서 모자를 끄집어내어 쓰고 보따리를 풀밭에 숨기고 밀정이 오는 곳으로 되돌아간다고 했다. 밀정이 보따리를 메고 가던 사람이 어디로 갔느냐고 물으면 방금 그 사람은 산으로 올라가더라고 대어 준 후, 밀정이 산으로 올라가면 다시 숨겨 둔 보따리를 찾아서 사라져 버린다.
그런 식으로 숨어서 살다가 1911년 8월 만주로 탈출하여 이상희(李象羲)·김동삼(金東三)을 찾아가서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와 같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남북만주 일대를 두루 살펴보고는 국권회복을 위한 준비의 장이 바로 그곳임을 깨닫는다. 그것은 다음의 글에서 여실히 알 수 있다.
"이 묵어 자빠진 넓은 지대가 토질도 비옥하니 우리들의 군사 훈련도 넉넉히 할 수 있고, 또한 다음날의 국권을 회복하는 길도 여기에 있겠다."
그는 그곳에서의 군사훈련을 위한 무기 구입자금 이백만 냥을 조달하기 위해 1912년 은밀히 국내로 들어왔다. 그는 각 지방으로 숨어 다니면서 평일에 알던 사람들을 찾아 자금을 마련해서 목적을 달성하였으나, 밀정의 밀고로 1913년 5월 영주(榮州) 소속 반구 왜경소(盤邱 倭警所)에 붙잡혔으며, 1914년 1월 29일 교수형을 받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2권 293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1권 129·179면
- 고등경찰요사 8면
- 판결문 (대구지법 1913. 9. 15)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186·234·393·394·586·72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169·17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22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권 420~61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2권 15·18·19·45·4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3권 211~219·575·668·73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