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7권(2009년 발간)
황해도 신천군(信川郡)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신천군의 만세운동은 문화읍(文化邑)에서 시작되었다. 문화읍에서는 천도교인들과 기독교인이 연계하여 3월 11일 장날을 기하여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계획하고 인근 각지로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였다. 이 날 오전 11시경 3백여 명의 시위대가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부르니 장꾼들이 호응하여 1천여 명의 만세 대열은 시가를 누비며 행진하였다. 뒤를 이어 3월 15일 초리면(草里面) 달천리(達泉里) 장날에는 초리면·궁흥면·문화면 3개 면민들을 중심으로 연합시위가 일어났으며, 3월 19일 용진면(用珍面) 유천리(柳川里)에서도 장날을 기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영향을 받은 김영호는 3월 27일 신천읍 장날을 이용해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하였다. 그는 무정리(武井里)의 훈련원 장터에서 200여명의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만세시위를 벌여 나갔다. 헌병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하고 시위대가 해산되기까지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김영호는 시위 직후 체포되어 1919년 7월 5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대해 그는 “조선은 반만년의 역사를 가졌고, 2천만 인민을 현재 가지고 있는 금수강산의 나라이다. 조선 민족이 이것을 당연한 정의의 길로 회복하려고 하는 것을 죄라고 인정한다면 세계에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며, 법률을 잘못 적용하는 것과 같다”라는 취지로 상고하였다. 그러나 1919년 9월 11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징역 1년이 확정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高等法院:1919. 9. 11)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2권 28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