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20.10.10
3. 1920.10.30
4. 1921
5. 1921.1
6. 1920.10.20 경성
7. 1921.12
(
8. 1921에 체포되어 동년 11월 9일에 검사 구형 15년 받음 (
9. 1921.11.15 징역 12년의 언도를 받음(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8권(1990년 발간)
서울 사람이다.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졸업하고 기독교 전도와 교회 부속학교 교사로 봉직하다가 간도로 건너가 유하현 고산자(柳河縣 孤山子)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수료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1920년 10월 서울 동대문밖 거주 암살단을 이끌던 김상옥(金相玉)에게 서면으로 연락하여 왕십리에 거주하는 목사 김태현(金泰鉉)의 집에서 면회하고 동단(同團)에 가입하였다. 이어 김상옥으로부터 권총 1정과 탄환 3발을 받아 수일후 엄준(嚴俊)을 방문, 군자금을 조달하여 상해로 망명하고 미국으로 갈 것을 권유하여 엄준의 찬동을 얻어 엄 준과 같이 동년 10월 10일 오후 1시경 고양군(高陽郡) 한지면(漢芝面) 경기도 평의원 임원상(林原相)집에 잠입하여 군자금 20원을 징수하여 김상옥에게 교부하였다. 동년 10월 30일 고양군 이만응(李晩應) 집에 들어가 1천원의 군자금을 낼 것을 요구하여 206원 50전을 징수하여 임시정부 특파원 홍준(洪俊)에게 수교하였다.
그는 1921년 서울의 변호사 정구창(鄭求昌)에게 5천원을 낼 것을 요구하였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김영두(金永斗) 집에 잠입하여 200원의 군자금을 징수하였다. 또 서울에 있는 이범열(李範烈)에게 군자금 2천원을 내라는 권고문을 발송하고 양주군(楊州郡) 거주 송신묵(宋信默)으로부터 군자금 20원을 징수하고 양주군 노해면(蘆海面)의 김만원(金萬源) 등 서울 시내외를 중심으로 연 7회에 걸쳐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동년 1월 11일 서울 예지동(禮智洞) 김노성(金魯聖)·김영두(金永斗)의 이서(裏書)로 쓴 소절수백원권(小切手百圓券 : 한일은행 동대문지점에서 찾음)으로 말미암아 단서가 되어 동월 16일 오후 7시경 태풍잡화점(泰豊雜貨店) 부근에서 엄준이 붙잡히고 그도 이튿날 오후 1시 반경 남대문 세브란스 병원내 김경배(金敬培) 집에서 붙잡혔으며 소지하였던 권총 1정, 탄환 1발, 폭탄 12개도 압수당하였다.
붙잡힌 후 동대문경찰서에 구속되었던 그는 1921년 11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511-513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0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559-56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796면
- 동아일보(1921. 9. 1, 10. 23, 11. 8, 11. 9, 11.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