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평안북도 신의주(新義州) 사람이다.
1931년 7월 신의주군 위화면에서 위화청년단(威化靑年團)을 결성하고 그 단장으로 추대되어 남북만주에서 활약하는 독립군(獨立軍)을 지원하였다. 만보산사건으로 한때 한중농민간의 분쟁이 일어나자 일본 경찰이 이를 역이용하고 사고확대를 획책하자 그가 소속되었던 위화군의 청년단원 수십 명을 동원하여 일본경찰 주재소를 수차 습격 방화하고 격투 끝에 체포되었다. 이로 인하여 다음해 (1932) 4월 28일 신의주 지방법원(新義州地方法院)에서 소위 소요죄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중국 하남성 개봉(河南省開封)으로 건너가 활동하다가 1944년 상반기 그는 선우 진(鮮于鎭)·김중섭(金仲涉)·김중호(金仲浩) 등과 함께 전방공작원 조동린(趙東麟)의 노력으로 부양에 집결하여 광복군 3지대에 입대하였다. 그는 조병걸(趙炳傑)과 함께 국내파견공작대원에 임명되어, 북경을 중심으로 한적(韓籍)학생들의 비밀조직망 구성, 초모공작 등의 활동을 벌였으며, 국내에 진입하여 평안도 지방에 거점을 확보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조국광복을 위한 항일투쟁에 힘쓰고 있던 중 광복이 되자 그는 임시정부 화북지구의 선무단(宣撫團) 부단장으로 임명되었고, 1947년 6월에는 안동현 주재 특파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48년 8월 중국 중앙군이 패망할 때 연안의 공산분자에게 체포되어 동년 안동현의 강변에서 처형되었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이 추서하였다.
- 신분장지문조회회보서
- 동아일보(1932. 4. 30)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409·411·424·427·429·61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