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1898년 9월 5일에 남궁억(南宮檍) 나수연(羅壽淵) 등과 함께 국한문혼용의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하여 독립정신 고취에 힘썼다.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1898년 11월의 만민공동회 때에는 간부로써 활동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유 근은 을사조약에 서명한 매국각료들을 통렬히 비판하고, 일제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이 황제와 각부 대신들을 협박한 사실을 신문에 게재하여 그 간악함을 폭로해서 필주를 가하였다. 1905년 11월 18일자 『황성신문』에 게재한 장지연(張志淵)의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 放聲大哭)」이라는 「을사조약」을 폭로, 규탄하는 유명한 논설을 쓸 때 장지연이 너무나 격분하여 끝을 맺지 못하자 유 근이 그 후반부를 끝내고 밤새껏 인쇄하여 배달하였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장지연이 일제에게 체포되고 『황성신문』이 무기정간 당하였다. 1906년 2월에 『황성신문』이 속간되자 장지연의 뒤를 이어 『황성신문』의 사장이 되어서 언론구국활동을 전개하였다.
「을사조약」후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에 가입하고, 대한자강회가 1907년 8월에 일제에게 강제 해산 당하자 1907년 11월에 권동진(權東鎭) 남궁억 오세창(吳世昌) 장지연 등과 함께 대한협회(大韓協會)를 발기하였다. 1907년 4월에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언론 출판 교육부문에서 활동했으며, 박은식(朴殷植) 김교헌(金敎獻) 등과 함께 최남선(崔南善)이 주도하는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지도하여 민족 고전을 출판하는 일에 힘썼다, 또한 1908년에 『신정동국역사(新訂東國歷史)』, 『초등본국역사(初等本國歷史)』, 1910년 『신찬초등역사(新撰初等歷史)』를 저술하여 국민의 애국심 계발과 역사교육에 진력하였다. 유 근은 1909년에 나 철(羅 喆) 오기호(吳基鎬) 등에 의하여 대종교(大倧敎 처음 이름은 檀君敎)가 창건되자 이에 가입하여 간부로 활동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일제가 1910년 8월 한국을 병탄하고 『황성신문』 등 모든 한국인의 신문들을 폐간하자 그는 후배들의 교육지도에 종사하였다. 1915년 경성고등보통학교 부설 교원양성소 학생들이 조선물산장려계(朝鮮物産奬勵契)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17년에 발각되어 체포되었을 때는 그들을 지도했다는 혐의로 일제에 의하여 한 때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1919년 3 1운동이 일어나자 동년 4월 임시정부를 조직하기 위한 국민대회(國民大會)에 13도 대표로 참석하여 이른바 「한성정부」라고 부르는 임시정부의 각료 선정과 정부체제 선택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또다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0년 4월 『동아일보(東亞日報)』가 창간될 때에는 언론계의 원로로서 양기탁(梁起鐸)과 함께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창간호 1면에 「아보(我報)의 본분과 책임」이라는 논설을 써서 민족지로서의 책임을 굳세게 이행할 것을 촉구하였다. 1921년에 서거하자 상해임시정부가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국권회복운동과 독립운동에 끼친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조선민족운동연감 9면
- 고등경찰요사 261 263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9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137 14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10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8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287 29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287 346 728 792 793 967 1194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46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