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3권(2017년 발간)
1920년 9월 함남 원산(元山)에서 시위 군중과 함께 파출소, 우편소, 일본인 상점 등을 공격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0년 9월 23일 원산 일대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만세시위는 같은 해 8월 미국 국회의원단의 방문을 기회로, 원산의 김장석(金章錫)ㆍ김상익(金相翊) 등이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널리 알리기 위해 추진한 계획이었다. 김장석은 김상익ㆍ조병철(趙秉喆)ㆍ이용구(李容九)ㆍ이용훤(李容暄) 등과 향후 계획을 협의한 후 역할 분담을 하였다.
1920년 8월 21일 김장석은 동지들과 김상익의 집에 모여 미국 국회의원단에게 보낼 환영문을 작성하였다. 그 내용은 미국의원단 환영, 일제의 가혹한 통치와 조선인의 불만 폭로, 미국의원단의 현명한 판단과 협조 등이었다. 그리고 거사일을 9월 23일로 정하였다. 김상익은 이 문건을 가지고 서울로 가서 각 계에 전달하고, 나머지 동지들은 만세시위를 준비하기로 하였다. 김상익은 상경하여 임무를 완수하고 9월 23일 원산으로 돌아왔다.
1920년 9월 23일 저녁 원산의 남산교(南山橋) 아래에서 산보하던 최종빈(崔鍾濱)ㆍ김연희(金演熙) 등이 갑자기 한양가(漢陽歌)라는 창가를 부르며 독립만세를 외치자 인근의 최종현(崔鍾炫)ㆍ이용구 등 다수가 합세하였다. 원산청년회관에 있던 김장석ㆍ감상익은 남산교의 함성을 듣고 동지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여기에 보광학교(保光學校) 및 원산공립보통학교(元山公立普通學校) 학생 6백여 명이 가세하면서 대규모 시위로 발전하였다.
이때 송일봉은 북촌동(北村洞) 경찰관파출소 부근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용구 등이 경찰관파출소와 일본인 상점을 파괴하라고 외치자, 군중을 이끌고 경찰관파출소와 일본인 상점에 돌을 던지며 격렬하게 투쟁하였다. 이어서 시위 군중을 이끌고 원산 시내를 돌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일제 경찰은 총칼로 탄압하여 현장에서 2명이 순국하고 주동자 약 50명이 붙잡혔다. 송일봉도 이때 동지들과 함께 붙잡혀 원산경찰서에서 58일간 취조를 받았다.
1920년 12월 23일 함흥지방법원(咸興地方法院)에서 이른바 출판법(出版法) 위반 및 1919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1921년 2월 23일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서 공소가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京城覆審法院 : 1921. 2. 23)
- 豫審終決書(咸興地方法院 元山支廳 : 1920. 12. 2)
- 刑事控訴事件簿
- 東亞日報(1920. 9. 25, 1921. 2. 24, 1922. 8. 31)
- 每日申報(1920. 12. 7, 12. 9~10, 1921. 2. 16)
- 朝鮮日報(1921. 2. 18.)
- 獨立新聞(1921. 1. 21)
- 新韓民報(1921. 3. 10)
- 思想月報(高等法院 檢事局 思想部, 1932) 제1권 제5호 485~500면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제2권, 673~67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