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공적정보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464
성명
한자 禹東鮮
이명 禹東善, 禹東先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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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62 훈격 독립장
1. 1905년 황해도(黃海道)에서 거의(擧義)하여 관서일대(關西一帶)전적(戰績)이 가장 현저(顯著)하였음
2. 그 후 적탄(敵彈)에 맞어 피체(被逮) 감금(監禁)중 심야에 적의 총을 탈취(奪取)하여 적 8명(敵八名)을 사살하고 최후까지 혈전(血戰)하다가 순사(殉死)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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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우용상(禹龍相)의 셋째 아들이다.

1905년 12월에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분기하여 황해도 구월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신천(信川), 재령, 안악, 은율 등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군을 습격하여 적군 다수를 사살하였다.

당시 신천·장연(長淵)·송화(松禾) 등지에서는 우동선을 비롯하여 조윤봉(趙允奉)·강만석(姜萬石)·장동찬(張東燦)·고익균(高益均) 등 유림 인사들이 을사조약을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우동선을 정동의려대장(正東義旅大將)으로 추대하였다. 그가 일찍이 용맹스럽고 담력이 있으며 전략·전술에 능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는 조윤봉·장동찬 등 여러 장령들과 함께 의병부대를 지휘하여 황해도의 서부지역 일대를 왕래하면서 적의 군사 시설을 파괴하고 적군과 관군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정세는 점점 기울어 일본의 침략 세력은 더욱 거세게 몰려들고, 나중에는 고종황제의 폐위, 군대의 강제 해산 등 무력에 의한 횡포가 자행되고 또 5적의 무리들을 조종하여 국민을 기만하며, 의병에 대하여서도 무력과 선유(宣諭)의 양면 정책을 써서 발악적으로 방해해 왔지만 그는 조금도 절의와 소신을 굽히지 않고 최후까지 항쟁을 계속하였다.

얼마 후 서상륜(徐相崙)이 선유 위원(宣諭委員)의 직함을 띠고 황해도 방면으로 와서 황제의 선유 조서와 함께 선유위원의 효유문 및 면죄 문빙(免罪文憑)을 보내며 의병을 해산하고 귀순하라고 권고하는데 대하여 그는 회답문으로 아래와 같은 공함(公函)을 보내었는데 여기에서 그가 얼마나 애국심에 투철하고 나라를 위하여서 신명을 돌보지 않았던가를 알 수 있다.

"내가 국민 중의 한 사람으로서 비록 지극히 완고하고 지극히 어리석지만 국세(國勢)가 위태로운 것을 통분하고 민생이 억압당하는 것을 억울하게 생각하니.

충의의 기운이 격동하고 온 몸이 끓어오르는 피를 억제할 수 없도다. 이래서 창의의 깃발을 들고일어나 감히 의병이 되어, 위로는 성상의 지극한 은혜를 저버리며 아래로는 동포들의 해를 끼치니, 이것이 나라를 구하려는 이 마음에 또 한 갈래의 근심이 되는 것이로다.

지금 황상폐하의 열 줄 윤음(綸音)과 각하의 한 폭 효유문을 받들어 재삼 읽어보니, 성지의 간곡하심에는 땀이 등골에 흐르려 하고, 효유하는 말의 간절함에는 눈물이 수건을 적시려 하도다.…

또 효유하는 말 중에 '시대를 생각지 못하고 경거망동하여, 나는 나비가 등불을 치는 격으로 화를 알지 못하니, 이것은 필부의 용맹에 지나지 못하는 일이라'고 하였으며,

특히 외국의 강한 힘을 항적할 수 없음을 말하였는데 그렇다면 저 장자방(張子房)이 진시황(秦始皇)을 치려는 일이나, 문천상(文天祥)이 연옥에서 순절하던 일은 본받을 것이 못된다는 말인가…

아아, 교인 동포여, 과연 신앙력이 있는가 없는가

조국의 위험한 경우와 백성들의 곤궁한 형편을 좀 생각해 볼지어다. 지금 이번 선유(宣諭)가 우리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한 일이라고 하지만, 어찌 위원이라는 한 벼슬자리에 쏠려서 장곡천·이완용 그 원수의 앞에 머리를 숙이고 복종할 수 있는 일인가…"

이상 우동선의 강개한 기개 못지 않게 그의 휘하 장졸 역시 빛나는 수훈을 남겼다.

소대장 조윤봉(趙允奉), 경리 이진대(李振大)는 활을 잘 쏘는 명궁(名弓)으로서 「정동의려대장(正東義旅大將)」이란 기치를 높이 세우고 있던 우동선 휘하에서 일본군을 다수 사살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조윤봉은 전사하고 그의 가족까지 학살되었으며 이진대는 적에게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의병장 우동선은 적이 쏜 총탄에 맞아 다리에 골절상을 입고 체포되어 감금되어 있다가 밤에 인적이 없는 틈을 타서 일본군의 총기를 빼앗아 적 8명을 사살하였으나 이에 놀란 일본군들과 끝까지 대항하여 격투를 전개하다 총탄을 맞고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407∼411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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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우동선 우창업(禹昌業), 우동선(禹東先) 황해 신천(信川) -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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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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