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평북 선천군(宣川郡) 선천읍(宣川邑)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일 오후 1시경 읍내에서 사립 신성학교(信聖學校) 학생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시위대열의 선두에는 이 학교 교사인 정상인(鄭尙仁)이 시위를 주도하였고, 군중들은 ‘대호! 조선 청년’이라고 쓴 깃발과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군청과 경찰서 앞을 시위 행진하였다.
한준겸은 당시 미동병원(美東病院)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날 시위대에 참여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신의주지청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공소하여 이해 6월 3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그는 다시 고등법원에 상고하였다. 그는 상고 취지문에서 “이번에 구주평화회의(歐洲平和會義)에서 결정한 민족자결주의에 관해 천재일우의 기회를 얻어 인도 정의로써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종래 우리의 일본에 대한 의향을 소급해 보면 약국을 보호하기 위해 보호조약을 체결하였다고 세계에 공언하였다. 그 후 우리 상하 인민이 원하지 않는 강제병합을 하였음에도 이는 우리 민족의 문명을 기대하고 동양평화 유지를 달성하려는 것으로 믿고 이를 방관하였는데, 합병 후의 정책은 식민지 대우에 지나지 않았다. 이를 어떻게 합병의 본의라 할 수 있겠는가? 이번에 일본이 5대 강국과 나란히 민족자결을 결정하고 우리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우리에 대한 외친내소(外親內疎)를 표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우리 조선의 독립선언은 실로 보안법의 범위에 들어가지 않는 것으로…”라고 하여 일제에 의한 강제 ‘보호’와 ‘합병’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해 7월 1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당하여 결국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권 853·855면
- 宣川郡誌(宣川郡誌編纂委員會, 1977) 259면
- 信聖學校史(信聖學校同窓會, 1980) 132∼133면
- 判決文(高等法院, 1919. 7. 12)
- 平安北道誌(平安北道誌編纂委員會, 1973) 84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1권 233∼23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