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6권(2021년 발간)
1919년 2월 24・25일경 함흥군 함흥면 중하리(中荷里) 예배당에서 이순영(李順榮)이 독립청원서에 한영호(韓泳鎬) 등의 서명을 받았다. 2월 28일에는 강봉우(姜鳳羽)가 교회에서 이근재(李根栽) 등에게 서울의 독립운동 준비 상황을 전했다. 이에 이들은 3월 3일 함흥 장날에 독립만세를 외치기로 결정하고, 준비위원을 선정하며 독립운동비를 거두었다. 3월 1일 원산으로 떠난 조영신이 다음날인 3월 2일에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날 밤 이규몽은 상리(上里) 이근재의 집에서 이영화(李榮華)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 약 4,000매를 인쇄한 후 100매를 가지고 집으로 귀가했다. 그리고 3월 3일 정오 무렵, 함흥 읍내로 나가 대화정 부근에서 동지들과 함께 선언서를 배포했다. 또한 그는 약 1,000명의 학생, 시위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읍내 일대를 활보했다.
이규몽는 만세운동 주도로 체포되어 1919년 6월 6일 구류되었다. 7월 4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공소를 제기하였다. 8월 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 취소로 징역 8월을 선고받고 상고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10월 9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을 선고받아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28일 칙령 제120호에 의해 징역 6월 18일로 변경되었다.
정부는 2020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경성복심법원・고등법원:1919. 8. 6 ・ 10. 9)
- 함흥지방법원 이시카와 검사의 3.1운동 관련자 조사 자료(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9)Ⅰ・Ⅱ, 8~10, 16~24, 33, 36, 61, 67, 163, 178~180, 199, 202, 321, 438~43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