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7권(2022년 발간)
1919년 4월 2일 양양군 양양면(襄陽面) 임천리(林泉里) 이교완(李敎完) 집에서 이석범·최인식(崔寅植)·김명기(金明基) 등이 회합을 갖고 독립만세를 외치기로 했다. 4월 4일 양양 읍내에서 독립만세를 외친 후 강현면(降峴面)·도천면·서면(西面)·손양면(巽陽面) 등으로 만세운동이 확대되었다.
이국범은 4월 4일 손양면 도리(道里) 김재한(金在漢)을 방문해 손양면과 현북면에 독립만세를 권유하기를 부탁했다. 김재한은 4월 5일 상광정리(上光丁里)의 김종대(金鍾大) 집에서 김종대와 이희원(李喜源), 4월 6일 명지리(明池里)의 권광식(權廣植) 등에게 독립만세에 참가하기를 권유하고 준비를 의뢰했다. 권광식은 명지리 지역을 담당하여 4월 8일 마을 주민들을 모았다.
4월 9일 아침 말곡리에서 김재한 등과 주민들은 함께 국기를 들고 현북면사무소로 향했다. 명지리 권광석은 홍필삼(洪必三)·이학봉(李學奉) 등 주민 40명, 대치리 구장 김종성은 주민 20명을 이끌고 면사무소에 도착했다. 상정광리에서는 김종대가 자신의 집 앞에 모인 주민들에게 구한국 깃발 1기씩을 배부했다.
정오 12시경 면사무소 앞에는 상광정리와 명지리 등 양양군 각 마을의 기독교 신자들과 주민들 약 500명이 운집했다. 군중들은 ‘대한국독립만세(大韓國獨立萬歲)’를 외치며 ‘면장을 앞세우고 양양 읍내로 가자’고 주장했다. 약 600명 군중들은 고개(만세고개)를 넘어가며 깃발을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일본 경찰들이 군중들이 흔드는 종이 소형 태극기 34기, 종이 대형 태극기 1기, 옷감 대형 태극기 1기를 압수하며 해산을 강요했다. 그러나 군중들은 계속 주재소를 공격하며 순사 2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에 강릉수비대 보병 79연대 상등병 이하 보병 5명이 시위대에 발포하여 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14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후 군경의 검거 작전으로 5월 14일까지 374명이 검거를 당했다.
홍필삼은 이처럼 현북면의 기사문경찰관주재소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군경의 무력 진압으로 인해 하광정리의 전원거(全元擧)·중광정리의 임병익(林秉翼)·말곡리의 문중희(文鍾熙) 등과 함께 현장에서 순국했다.
정부는 202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경성복심법원:1920. 3. 8)
- 매일신보(每日申報)(1919. 4. 26, 12. 4)
-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7-1)(전국각지의 4월 8일과 9일 시위 상황, 1919. 4. 9)
-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7-7)(독립운동에 관한 건 제43호, 1919. 4. 10)
- 대정8년(大正八年) 소요사건(騷擾事件)에 관(關)한 도장관보고철(道長官報告綴) 7책(冊)의 내(內)(2)(강원도장관, 전보 보고, 1919. 4. 10)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제2권 62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