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7권(2022년 발간)
1919년 2월 28일 기독교계에서는 해주(海州)와 연백(延白)에, 천도교계에서는 서흥(瑞興)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해 각처로 배포됐다. 3월 1일 해주 남본정 교회에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고 황주·옹진(甕津)·수안(遂安)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어 배포되었다. 그에 따라 3월 2일 황주와 옹진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됐다.
2월 28일 서울에서 천도교계와 기독교계가 평양에 「독립선언서」를 교부했다. 천도교계는 김홍렬(金洪烈)이 이종일(李鍾一)에게 「독립선언서」 5,000매를 수령해 평양교구 공선원 김형국(金衡國)에게 2,000매를 교부하고 나머지는 의주에 전달했다. 3월 1일 김형국에게서 200매를 수령한 김성진(金聖鎭)이 중화천도교구실에 가서 송헌(宋憲) 등에게 전달했다. 이어 최창룡(崔昌龍)이 10여 매를 가지고 중화에서 황주천도교구실에 도착했다. 교구장 김성준(金聲俊)은 황기타(黃己拕), 최석길(崔錫吉) 등과 「독립선언서」 배포와 독립 선언의 발표 방안 등을 협의했다.
3월 2일 황기타는 천도교구실에 모인 교도와 주민들을 이끌고 황주면 읍내 성남리의 남천리(南川里)시장으로 갔다. 오후 2시경 시장에서 황기타 등은 「독립선언서」를 게시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했다. 시장에 있던 군중 300명도 호응해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군중들은 시장 일대를 활보하고 황주성(黃州城) 안으로 들어가 황주경찰서 앞으로 행진했다.
오후 2시 30분경 황주경찰서 경찰 10여 명이 출동해 군중들의 독립만세를 제지했다. 강형섭(康亨燮), 김병식(金炳植)을 붙잡아 경찰서로 구인하고 순사 2명이 군중들을 설득하며 해산을 요구했다. 100여 명의 군중들은 경찰서 구내로 들어가 구금 인사 석방을 요구하며 항의했다. 이어서 유리창 7~8장을 깨뜨렸고 밖에 있던 군중들도 주재소에 투석으로 저항했다.
경찰서에서 나온 황기타·최석길·이준근(李俊根) 등은 예배 장소인 야소교 교회당에 들어가 교인들에게 「독립선언서」의 취지, 공약 3장 등을 설명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오후 5시경에 일본 경찰들이 교구실로 기습적으로 쳐들어와 휴식을 취하던 교인들을 체포하며 탄압했다. 경찰은 85명을 검거해 80명을 구속하고 97명을 훈방 조치했다.
이처럼 현영권은 황주시장 일대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행진하던 중에 경찰에 체포되었다. 평양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이후 복심법원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징역 1년 6월형이 확정되고 옥고를 겪었다.
정부는 202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고등법원:1919. 7. 12)
- 매일신보(每日申報)(1919. 3. 7)
-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7-7)(독립운동에 관한 건 제3보, 1919. 3. 2)
-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7-7)(독립운동에 관한 건 제4보, 1919. 3. 3)
-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7-1)(조선소요사건일람표에 관한 건, 1919. 10. 2)
- 대정8년(大正八年) 소요사건(騷擾事件)에 관(關)한 도장관보고철(道長官報告綴) 7책(冊)의 내(內)(2)(황해도장관, 전보, 1919. 3. 2, 3. 3)
- 대정8년(大正八年) 소요사건(騷擾事件)에 관(關)한 도장관보고철(道長官報告綴) 7책(冊)의 내(內)(2)(소요사건에 관한 보고, 1919. 3. 8)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제2권 255~25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