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3월 16일 오후 9시경 주문도 주민 120여 명이 모인 교회에서 유봉진(劉鳳鎭)이 신약전서에 있는 「의리를 구하라」란 글귀를 설명하고, “조선인민이 독립을 바란다면 침묵해서는 안 되니 크게 ‘독립만세’를 불러서 소요를 일으켜야 한다. 나는 그 운동을 위해 결사대원이 되어 천명을 다하지 못할 것이며, 언제 죽을지 모른다. 금후는 천국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결사대에 찬성하는 자가 있으면 손을 들라하여 최공섭은 손을 들어 찬성하였다.
최공섭은 만세시위에 참가하기 위하여 17일 유봉진과 함께 주문도를 출발하여 삼산면(三山面) 하리(下里)에 도착하여 강화 읍내로 갔다. 3월 18일 오후 2시 시위대가 신문리(新門里) 석교(石橋) 부근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군청·객사·공자묘로 진출하자 시위 인원이 5,000~6,000명으로 늘어났다. 군청 앞에서 3시간 동안 독립연설회와 시위행진을 벌이던 군중은 오후 5시경 경찰서를 포위하고 억류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일본 경찰은 시위대의 위세에 굴복하여 유희철·장상용(張相用)·조기신(趙基信)을 석방하였다. 시위군중들은 밤 8시 30분 경찰서 앞에서 일시 해산하였다가 재차 시장에 모여 늦은 밤까지 만세를 외친 뒤 자진 해산하였다.
최공섭은 주문도에서 결사대에 가입하고 강화읍내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었다. 1919년 12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출판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고초를 겪었다.
정부는 201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경성지방법원:1919. 12. 18)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국사편찬위원회, 1996) 제26집 204~206면
- 한국독립운동의 역사(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제19권 34~3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