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7권(2022년 발간)
1919년 3월 3일, 4일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楊下面) 시남동(市南洞) 양시(楊市)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됐다.
평안북도 의주(義州), 선천(宣川)은 독립선언 추진 과정에서 민족대표와의 교류와 계획에 따라 독립선언식을 준비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선언식에서 미리 제작한 독립 유인물과 선언서를 배포하고 행사 중에 도착한 민족대표의 「독립선언서」도 일반에게 배포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 행진을 전개했다. 3월 2일에는 의주, 선천에서 독립만세를 외쳤고 3일에는 선천 남면(南面)과 읍내·의주 비현면(枇峴面)·용천(龍川) 양하면(楊下面) 등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용천군 양하면 시남동 양시시장에서는 3월 3일 저녁, 3월 4일 오후와 저녁까지 총 3회에 걸쳐 독립만세운동이 이어졌다. 3월 3일 오후 양시시장에서는 ‘조선의 독립이 확실시되어 평양, 선천, 의주 각 지방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는 말이 공공연히 퍼졌다. 오후 7시경 시장에서 음식점을 하던 조영화(趙永華)도 김득영(金得詠)의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다. 오후 9시경 시남동 시가지에서 주민들이 만세를 부르며 활보했다. 조영화는 조선 독립을 확신하며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다음날 3월 4일 조영화 등이 김득영의 상점으로 모였다. 이들은 이창선(李昌善)과 이익조(李益祚)의 권유에 따라 기부금 1원 정도를 모아 이익조에게 전달했다. 장날이었던 탓에 양시 시장터에는 일찍부터 약 5,000명의 군중들이 모였다. 그 중 최영선(崔永善), 공수(孔洙) 등 10여 명의 만세시위 주도자들이 태극기, 독립기(獨立旗)를 시장 한 가운데에 세우고 군중들에게 독립만세를 외쳤다. 군중들은 나팔을 불며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남동 시가지를 행진했다. 오후 9시가 되자 시가지에 다시 약 600명의 군중들이 집결했다. 군중들은 손에 등불을 들고 어둠을 밝히며 만세 행진을 전개했다.
조영화는 이러한 양시 3.1운동에 참가하여 독립만세를 외치고 기부금을 출연하여 양시경찰관주재소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평양지방법원 신의주지청 검사분국으로 송치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5월 24일 평양복심법원에 제기한 공소가 기각되고, 6월 28일 고등법원의 상고도 기각되어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정부는 202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고등법원:1919. 6. 28)
- 신분장지문원지(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 매일신보(每日申報)(1919. 3. 8)
-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7-7)(독립운동에 관한 건 제7보, 1919. 3. 6)
-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7-1)(조선소요사건일람표에 관한 건, 1919. 10. 2)
- 대정(大正) 8년 소요사건(騷擾事件)에 관(關)한 도장관보고철(道長官報告綴) 7책(冊)의 내(內)(2)(평안북도장관, 전보, 1919. 3. 4)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제2권 43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