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의령의 3.1만세시위는 구여순이 최정학·이우식·김봉연과 함께 정용식의 병원에서 3월 14일 의령읍 장날에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면서 시작되었다. 3월 14일 오후 1시 구여순은 군중들에게 열띤 호소를 하고, 남인섭은 나라 없는 백성의 서러움을 눈물로 호소하면서 군중들에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다. 구여순을 비롯한 주도인물들이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군중들은 일제히 호응하면서 만세를 연호하였다. 정호권도 오후 3시경 읍내외시장에서 다수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특히 정호권은 3월 16일 오후 1시경 지정면 봉곡리 시장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모인 약 150명의 군중에게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였으니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자는 취지의 연설을 하고 함께 만세를 불렀다. 당시 의령경찰서 중교경찰관주재소에 근무하는 순사보는 봉곡리 시장을 단속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시장에 모인 군중들의 만세시위가 점차 과격해지자 이들을 진압하려 하였다. 그런데 시위군중 중에서 순사보를 살해하자고 큰소리로 떠들자 많은 사람들이 발로 차고 위해를 가할 기세를 보이기에 순사보는 그 부근 주막으로 피신하였다. 이에 군중은 순사보를 추적하여 주막에 이르렀고 정호권은 시위군중을 지휘하였다.
3월 18일에도 정호권은 오전 11시경 남곡면(南谷面) 남지리(南旨里) 장날 시장에 가서 다수의 군중에게 조선독립에 대한 연설을 하고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처럼 정호권은 3회에 걸친 의령군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8일 부산지방법원(釜山地方法院) 진주지청의 징역 2년 판결에 불복하여 공소를 제기했다. 1919년 6월 5일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에서 이른바 ‘소요·보안법(保安法) 위반·공무집행방해’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상고하였다. 1919년 7월 17일 고등법원(高等法院)에서 기각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1년 1월 17일 출옥하였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한국독립운동의 역사(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20권 287~288면
- 판결문(判決文)(대구복심법원:1919. 6. 5)
- 판결문(고등법원:1919. 7. 17)
- 신분장지문원지(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