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8권(2023년 발간)
1919년 2월 21일 서울의 독립선언 추진계획을 들은 목사 정춘수(鄭春洙)는 전도사 이순영(李順榮)과 시위 추진을 협의했다. 이순영은 이가순(李可順)과 원산에서 독립선언서를 제작하기로 계획했다.
이에 이가순은 함경남도 원산부 진성여학교(進誠女學校)의 교사 정연수와 인이극(印利極)‧이진구(李進九) 등에게 만세운동 참여를 권유했다. 이들은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라는 제목과 ‘손병희 외 삼십이명’의 명의(名義)를 포함한 원산 독립선언서 약 2,000매를 인쇄했다.
3월 1일에 이가순은 경성의 독립선언서 50매를 함경남도 각 관청에 발송하고 원산의 독립선언서 2,000매를 광성학교(光成學校) 학생들에게 배포했다. 오후 2시 원산리 시장에서 이순영과 이가순은 군중들에게 독립선언서에 따른 만세시위를 촉구했다.
이에 정연수가 차용운(車用運)‧김기헌(金基憲) 등과 함께 호응하여 군중을 이끌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장을 행진했다. 여기에 시장에 있던 주민들이 합류하면서 시위대가 3,000명에 이르렀다. 오후 4시에는 약 500명의 군중들이 음악대에 맞추어 시가 행진을 전개했다.
그러자 일제는 원산경찰서, 3개 주재소의 경찰과 소방부, 재향군인회원 등을 출동시켰다. 추가적으로 원산헌병대의 지원까지 받고 나서야 시위대를 해산시킬 수 있었다. 이때 현장에서 시위주도자 30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후 검거 작전으로 인한 체포자까지 합쳐서 총 93명이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정연수는 이처럼 원산 독립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3월 3일 구류되었다. 이후 신문조사를 받고 함흥지방법원 원산지청 검사분국으로 송치되었다. 1919년 4월 9일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으로 원산지청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7월 3일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2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경성복심법원 : 1919. 5. 26)
- 판결문(判決文)(고등법원 : 1919. 7. 3)
- 매일신보(每日申報)(1919. 3. 7, 3. 12, 3. 25, 6. 7)
- 신한민보(新韓民報)(1919. 5. 6)
- 형사공소사건부(刑事控訴事件簿)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제2권 669~67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