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8권(2010년 발간)
1919년 3월 4일 평남 대동군(大同郡) 김제면(金祭面) 원장리(院場里) 장날 합성학교 (合成學校) 운동장으로 모여든 사람들은 10시에 독립선포식을 치르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원장시장으로 행진했다. 시장에 모였던 사람들도 합류하여 군중의 수는 급속도로 늘어났다. 그러자 반석교회 장로 최능현(崔能賢)과 모락장교회 목사 송현근(宋賢根)이 모락장(沙川場)의 시위운동이 사전에 발각되어 동지들이 헌병대 유치장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그들을 구출하자고 호소하였다.
시위군중은 유치장에 갇혀있는 동지들을 구출하기 위해 원장(院場)을 출발해 모락장으로 나아갔다. 시위행렬의 선두가 사천 시장으로 들어갔을 때 일본군은 실탄사격을 가했다. 이에 군중은 의분을 금치 못하고 맨주먹으로 일본헌병에 대항하였다. 그 과정에서 몇 사람이 죽고 많은 부상자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군중은 해산하지 않고 총탄을 쏘아대는 헌병주재소장과 보조원을 붙들어 처단하고 구금 중에 있던 동료들을 구출하였다.
사천 투쟁에서 현경묵(玄景黙)·이종권(李宗權)·이봉훈(李鳳勳)·윤창도(尹昌道)·윤관도(尹觀道)·김면호(金冕浩) 외 13명은 현장에서 총탄에 맞아 순국(殉國)하였다. 중경상자들은 차병규(車炳奎) 외 40여 명에 달하였다. 일제는 즉각 보복을 개시하여 경찰과 군대가 대거 출동, 원장·반석·사천 등지를 중심으로 남자들을 무차별 검거했다. 4백여 명을 무차별 검거하여 20여 일간이나 유치하고 고문 끝에 최명흠(崔明欽)과 김점현(金漸鉉)이 사망하였다.
임원걸은 1919년 12월 6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살인·방화·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5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驥驢隨筆(국사편찬위원회) 274면
- 判決文(高等法院:1919. 12. 6)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5집 635~641면
- 假出獄關係書類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2권 409~41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