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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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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3년
○ 1934년
○ 1935년
○ 1936년 3월
○ 1937년 4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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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황해도 안악(安岳) 사람이다.
평양 대성(大成)중학을 수료하고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중,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시위에 참여하였으며, 1920년에는 진남포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기도 하였다고 한다. 조선일보 안악지국과 동아일보 안악지국의 기자로 근무하였으며, 1921년 7월에 임시정부에서 국내에 파견된 홍완기(洪完基)를 알게 되어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으나 홍완기가 체포당하자 상해로 망명하였다.
1922년에는 임시정부 경무국장인 김구(金九)의 지시에 따라 노종균(盧鍾均:일명 金東宇)과 함께 임시정부 비서장이며 군자금 40만 루불을 도용, 낭비한 김립(金立)을 사살하였다. 이는 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이 1920년 1월 22일 소련에 비밀 외교원으로 여운형 안공근, 한형권을 선임하였는데 당시 국무총리였던 이동휘가 소련 외교를 임시정부가 아닌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에서 독점할 계획으로 한형권만을 소련에 보냈다.
이동휘는 다른 용건으로 간 박진순, 이한영, 박애(朴愛)도 한형권과 같이 일하게 하였는데 이한영은 먼저 상해로 돌아와 그해 5월에 결성됐던 공산주의자 조직에 가담하였고, 박진순과 박애(朴愛)는 7, 8월에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 참석하여 활약하였다.
한형권은 박진순 등의 도움을 받으며 임시정부의 신임장으로써 레닌정부와 교섭하여 '한 로 비밀 협약'을 맺고, 2백만 루불의 원조를 약속 받았다. 그리하여 1920년 10월 2백만 루불 중에서 우선 60만 루불을 받아 가지고 20만 루불은 모스크바에 예금해 놓고, 40만 루불만 가지고 상해로 향하였는데 도중 치타에서 김립(金立)과 만나게 되었다. 김립(金立)은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 참석하러 모스크바로 가는 도중이었는데 모스크바에서 돌아오는 일행들과 치타에서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코민테른 제2차 대회는 이미 끝난 때이었으니 김립이 모스크바로 갈 필요는 없었다. 이리하여 한형권이 가져오던 자금은 김립에게 전달되었고, 김립이 그것을 그해 12월에 상해로 가져왔던 것이다.
한편 한형권은 남은 돈 때문에 모스크바로 갔고, 박진순은 상해로, 박애(朴愛)는 치타에서 한인사회당 세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극동정부 원동부에 한인부를 설치하고 시베리아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경로를 밟아 제2차 자금이 들어왔으나 이동휘 등은 그 사실을 전연 비밀에 붙이고, 오로지 공산주의 운동에만 사용했던 것이다. 이것을 알게 된 임시정부 요인들은 이동휘를 규탄하게 되었고, 여운형, 안병찬 등 이동휘와 함께 공산주의자 그룹을 만들고 있던 사람들도 반발하여 결국은 임시정부의 분열을 낳았고, 상해 독립운동 사회에 큰 소란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이동휘는 국무총리직을 사임하였으며, 김립은 또한 임시정부의 지시로 사살 당하게 된 것이다.
1922년 10월에 그는 김구(金九)의 권유로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에 가입하게 되었고 이 결사단체에서 하남성(河南省)에 파견되어 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후 개봉(開封)에 있는 풍옥상(馮玉祥)의 육군 공병창 좌도부( 刀部)에서 활동하다가 1925년 11월에 사퇴하고, 1929년 여름 상해로 들어갔다.
1930년에는 천진과 길림, 하얼빈 등지에서 정화암(鄭華岩), 주열(朱烈), 차고동(車鼓東), 백정기(白貞基) 등과 만나 각국 무정부주의자(無政府主義者)들과 교유하였다. 이에 그는 이들과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 상해부를 조직하고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의 회원으로 활약하였다. 이회영(李會榮)이 일경에 체포되자 1932년 밀고자인 밀정 이규서(李圭瑞), 연충열(延忠烈)을 처단하였으며, 1933년 3월에는 주중일공사 유길명(有吉明)의 암살계획에도 참여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34년에는 김구에게 가서 한국독립군특무대(韓國獨立軍特務隊)를 조직하고 김구(金九)가 특무대장이 됨에 따라 그의 비서가 되어 활동하였다.
1935년 말에는 남경에서 유형석(柳瀅錫), 한도원(韓道源), 김동우(金東宇)와 같이 맹혈단(猛血團)을 조직하고 단장에 추대되어 상해를 중심으로 군자금 모집, 밀정처단 등의 활동을 계속하였으며, 1936년초 상해 일 영사관을 습격하려고 활동 중 발각되어 동지들과 함께 체포당했다. 그는 결국 고등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1938년 5월 16일에 평양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1937. 4. 16 해주지방법원)
- 국외용의조선인명부(총독부경무국) 134면
- 사상정세시찰보고집 242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63 472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92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551·569 588 593·608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874 87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37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619, 78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127, 822, 824, 829, 830, 831, 832, 836, 837, 83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