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8권(1990년 발간)
전남 강진(康津) 사람이다.
30세되던 1894년에 서울에 와서 지사들을 사귀고 한때 주사(主事)직에도 있었던 그는 정국이 날로 혼미해짐을 보고 공적에서 물러나 나인영(羅寅永)·이 기(李沂) 등 지사들과 친교를 맺으면서 구국 제세(濟世)의 길을 강구하였다.
1905년 러·일전쟁 이후 그는 나인영과 함께 러·일 강화 회담이 열리는 미국에 가서 조선의 독립자주권을 보장하도록 노력할 것을 기도하였으나 일본공사 임권조(林權助)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그러자 다시 나인영·이 기 등과 함께 의논하고 일본 동경으로 가서 그곳 정계 요로에 글을 보내 조선에 대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당초의 약속을 지켜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며 계속 여러 차례에 걸쳐 그곳 조야(朝野)의 정객들과도 만나 동양평화·한국독립 보장을 위한 일들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행하고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자 이에 분격한 그는 일본에서의 비폭력·평화적 독립운동의 모색을 단념, 귀국하여 먼저 오적(五賊)대신을 처단함으로써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 국권을 회복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듬해 3월 25일 나인영 등 지사들과 함께 여러 곳에서 일제히 거사하여 5적을 동시에 처단하기로 하였으나 장사 이홍래(李鴻來)·강원상(康元相) 등이 사동(寺洞)에서 군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을 습격하는데 그치고 많은 참가자들이 곤액(困厄)을 겪게 되었다. 여기서 나인영·오기호·김인식은 자현장(自現狀)을 가지고 평리원(平理院)에 나가 자수하여 모든 일은 자신들의 책임이요 다른 사람들은 죄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해 7월에 그는 유형(流刑) 5년에 처해져 일시 지도(智島)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1909년 대종교(大倧敎)가 새로 발전함과 함께 대종교 포교에 의한 종교 보국운동에 진력하다가 1916년 12월 24일 서울 권농동(勸農洞) 우거(寓居)에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매천야록 343·408·41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720∼726·72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28·32·33·541∼54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92·15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322·417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91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442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3권 289면
- 해학유서 14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