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8권(2023년 발간)
1919년 3월 7일 오후 7시 충청남도 공주 앵산공원 야소교회당 앞에 약 150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위해 모였다가 해산했다. 다음날인 3월 8일 충청남도장관 구와하라(桑原)가 공주‧임천‧부여‧논산에서 집회 금지를 지시했다. 그럼에도 고종의 국장(國葬)에 다녀온 박장래(朴璋來)가 공주의 학생들에게 만세시위를 권유했다. 공주 지역의 만세운동은 4월에도 지속되었다.
4월 1일 공주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주도하여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외쳤고, 정안에서는 이기한(李綺漢)이 석송리에서 만세운동을 시작했다. 이때 이월성은 최범성(崔範聲) 등과 함께 작업 도구인 쇠스랑‧곡괭이‧삽‧지게 등을 갖추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광정리로 이동했다.
광정리 도착한 300명의 시위대는 독립만세를 외쳤고, 이기한이 ‘주재소를 파괴하자. 왜 구경만 하느냐! 빨리 부수라!’고 외치며 깃대로 주재소 문을 깨뜨렸다. 이에 이월성은 삽을 이용해 주재소 좌측 담을 파괴하고 창문틀을 부수었다.
이처럼 주재소를 응징한 군중들은 석송리로 돌아와 주막에서 휴식을 취했다. 이에 오후 4시경 공주에서 헌병과 경찰들이 출동하여 주막 앞에서 시위 군중들과 충돌했다. 야간에도 약 600명의 군중이 광정리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주재소를 파괴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이월성은 공주경찰서 경찰에 체포되어 5월 9일 구류되었다. 1919년 8월 17일 ‘보안법 위반’에 대한 예심종결 결정으로 공주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어 9월 20일 징역 1년 2월을 선고받았다. 11월 1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 부분 취소에 징역 10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2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경성복심법원 : 1919. 11. 17)
- 형사사건부(刑事事件簿)
- 형사공소사건부(刑事控訴事件簿)
- 수형인명부(受刑人名簿)
- 매일신보(每日申報)(1919. 10. 6)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제3권 10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