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영덕군의 독립만세시위는 고종 장례로 상경하였다가 서울에서 3.1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온 구세군 참위 권태원(權泰源)과 기독교 장로교회 김세영(金世榮) 등이 만세주도하였다. 예수교 장로교회 조사 강우근(姜佑根)은 3월 16일 영덕읍내 교회에서 김암우(金岩佑) 등에게 한국이 독립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리고 18일 영덕읍 장날에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하였다. 강우근은 기독교인 50여 명을 규합하여 태극기를 품에 안고 3월 18일 영덕읍 시장으로 들어갔다. 한편 영양 석보의 이승구는 7~8년 전부터 한국의 독립을 희망하고 있었던 바, 1919년 3월 16일 박윤규로부터 각 지역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는 것을 들었다.
이에 각 지역과 서로 호응하여 이 운동을 일으키고자 17일 이승구는 김혁동·안상용(安尙龍)·이명언(李明彦)·김태을(金太乙)·안석종(安石鍾)·박윤규·최기영(崔起榮) 등과 18일 영덕 읍내 장날을 기회로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계획하였다. 18일 오후 2시 반 이승구·강우근 등 50여 명은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일본 군경이 출동하여 주도인물 강우근을 비롯한 20명의 시위 군중을 검거하고 나머지 군중들을 총검으로 위협하여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승구는 3월 18일 영덕읍 장날 만세시위로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2일 대구지방법원 영덕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공소를 제기했다. 1919년 5월 2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 부분 취소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상고하였으나 1919년 6월 26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27일 출옥하였다.
정부는 201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대구지방법원 영덕지청:1919. 5. 2)
- 판결문(대구복심법원:1919. 5. 22)
- 판결문(고등법원:1919. 6. 26)
- 신분장지문원지(身分帳指紋原紙)(경찰청)
- 한국독립운동의 역사(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제20권 318~32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