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6권(2006년 발간)
평소 민족의 비운을 한탄하며 독립운동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그는 1919년 함흥군 주북면에 거주하는 이기완(李岐完)과 함께 한인 관리 포섭운동에 착수하여 운동자금을 모금하는데 앞장섰다. 그는 이원(利原)과 북청(北靑)지역을 담당하여 운동자금 모금에 진력하였다.
그러던 3월 7일경 서울에서 온 기독교 신자 박용해(朴龍海)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아 보고 고향인 함남 이원에서도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고, 서면(西面) 천도교 교구실로 교구장 김병준(金秉濬)을 찾아가 협의하였다.
그들은 ‘조선독립단 이원지단’을 결성하기로 하고, 우선 박용해가 전해준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기로 하고 천도교 교구실에서 등사판을 이용하여 동지들과 함께 5백여 매를 등사하였다. 3월 10일 그는 동지들과 함께 읍내 장터로 나가 수백 명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조선민족독립단(朝鮮民族獨立團)’이라고 쓴 대형 깃발을 흔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신간회 이원지회에 참여하여 검사위원장(檢事委員長)에 선임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判決文(京城地方法院, 1919. 11. 6)
- 東亞日報(1929. 8. 14)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2권 716∼717면
- 豫審終結決定(京城地方法院, 1919. 8. 30)
- 判決文(京城覆審法院, 1920. 2. 27)
- 判決文(高等法院, 1920. 4. 8)
- 韓民族獨立運動史資料集(국사편찬위원회) 별지 제6권 3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