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20년 8월
3. 1920년 12월 17일
4. 1921년 2월 22일
5. 1927년 7월 1일
(
6. 1927년 월 일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1987년 발간)
평남 중화(中和)사람이다.
1909년 서울 YMCA 영어학교를 수료하였으며,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만주로 건너가 부친 여순근(呂淳根)과 김승만(金承萬)을 만나 임시정부와의 연락방법과 국내활동 방안을 상의하고 귀국하였다. 그후 재차 상해를 다녀와서 홍석운(洪錫雲)·이기영(李起榮)·김예진(金禮鎭)등과 항일구국단(抗日救國團)을 조직하고 그 총무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19년 11월에 만주로부터 돌아온 표영준(表永俊)·유성삼(劉成三)의 편으로 권총이 반입되고, 주석환(朱錫煥)·김상만(金相萬) 편으로 폭탄이 반입되었다. 이들은 평양 기홀병원(紀笏病院)에서 만나 결사의용단(決死義勇團)을 조직하고 각지에 지부를 설치하는 한편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
그러던 차 1920년 8월 3일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의 결사대 제3대의 장덕진(張德震)·박태열(朴泰烈) 등이 입국하니 그들과 협력하여 평남도청과 평양경찰서 등 일제의 주요기관을 일시에 폭파하기 위한 행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표영준과 함께 그날 밤 9시 30분 평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고, 평양성 서쪽의 칠성문(七星門)으로 피신하다가 일경의 불심검문을 받게 되자 이를 사살하였다. 같은 달 20일에는 평남경찰부장이 탄 자동차를 부벽루(浮碧樓) 앞에서 저격하였으나 운전수만을 부상시켰다. 그리고 22일에는 평양에서 20리쯤 떨어진 노상에서 일경을 만나자 이를 사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경의 추적으로 1920년 9월 5일 중화(中和)경찰서에 체포되었으며, 1921년 2월 22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8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27년 8월 22일 출옥하였다.
출옥 후 즉시 만주로 건너가 부친과 이청천(李靑天)·허영백(許英伯) 등의 선배들을 만나 보고 상해로 가던 도중, 일본영사관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어 거주제한을 받았다. 그러나 그후에도 평양신사 방화와 군사시설 파괴 등의 계획을 추진하다가 다시 일경에게 체포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78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8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288·28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467·961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1권 분책 46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302·304·30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467·96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