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평남 대동(大同) 사람이다.
1919년 3월 4일 대동군 금제면(金祭面) 반석면(班石面) 상사리(上四里) 원장(院場) 장날에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반석면 반육리(班六里)에 있던 반석교회(盤石敎會)의 장로인 조진탁(曺振鐸)이 2월 28일 평양에 갔다가 그곳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뒤, 독립선언서를 얻어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오면서부터 추진되었다.
조진탁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원장교회에 들렀을 때, 윤상열을 비롯한 교회지도자들인 고지형(高志亨)·차현구(車賢九) 등은 그로부터 평양의 만세운동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반석교회의 지도자인 최능현(崔能賢)·백이옥(白履玉)·송현근(宋賢根) 등과 함께 모의하여, 반석·원장 두 교회가 중심이 되어 3월 4일을 기하여 원장교회의 합성학교(合成學校)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런데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준비를 하던 중 모락장(沙川)교회의 간부 10여 명이 헌병주재소로 강제 연행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만세운동은 예정대로 3월 4일 10시 독립선언식을 시작으로 전개되었다. 시위군중은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원장장터로 행진하였다. 이에 그곳에 모인 장꾼들도 합세하여 시위군중은 3,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때 윤상열은 주도자들과 함께 모락장의 시위운동 준비중에 붙잡힌 동지들을 구하기 위해 시위군중들을 모락장으로 이끌었다. 그들은 대형 태극기와 나팔수를 선두에 세우고 청년들이 앞장서서 의기충천하여 모락장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이때 한 청년이 반석면장 김종화(金宗化)가 오늘의 거사 계획을 밀고하여 일본 헌병들이 지금 모락장 입구에 무장하고 매복해 있다는 사실을 알려왔다.
그러나 윤상열은 이에 위축되지 않고 시위군중에 앞장서서 계속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여 모락장 입구까지 들어섰다. 그때 대기하고 있던 일본 헌병들은 발포하며 이들을 저지시키려고 하였지만, 시위군중들은 투석으로 대항하며 계속 전진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만세시위를 앞장서서 주도해 가던 동지들이 총탄을 맞고 쓰러지자, 더욱 기세를 올려 일경들을 몰아부쳤다.
사태가 불리함을 느낀 일본 헌병분견소장 좌등실오랑과 보조원 3명이 도망치자 윤상열은 동지들과 함께 좌등(佐藤)을 쫒아가 돌로 격살(擊殺) 하였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11월 4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살인·방화·소요 및 보안법으로 무기징역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1919. 11. 4. 平壤覆審法院)
- 騎驢隨筆(宋相燾) 274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789∼797面
- 每日申報(1919. 8. 15, 8. 19)
- 東亞日報(1927. 6. 11)
- 韓國獨立運動史(國史編纂委員會) 第2卷 1112∼1133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4輯 982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