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9년 북만석하 (北滿石河) 에서 한족총연합회 (韓族總聯合會) 를 조직하고 청년부장 (靑年部長) 에 피선.
○재만조선인 (在滿朝鮮人) 아나키스트연맹 (聯盟) 에 가입하여 백정기 (白貞基) , 정화암 (鄭華岩) 과 같이 상해 (上海) 로 옮겨 백오인사건의 일인이었던 옥관빈 (玉觀彬) 의 변절악행을 묵과할수 없어 이를 처치.
○상해남화한인동맹원 (上海南華韓人同盟員) 으로 일본대사 (日本大使) 유길명 (有吉明) 의 암살미수후 1934년 3월 25일 상해조선인거류민회장 악질주구 이용로 (李容魯) (영로 (榮魯) )를 살해후 피체 .
1936년 3월18일 사형언도를 받고 1938년 4월 9일 사형.
(동아일보 (東亞日報) 1963. 5. 20) (이상은 공적서에 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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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3월18일 사형언도를 받고 1938년 4월 9일 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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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체(被逮) : 남에게 붙잡힘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경북 영양(英陽) 사람이다.
일찍이 만주에 망명하여 1929년에 북만주(北滿洲) 석하(石河)에서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조직하고 청년부장(靑年部長)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또한 재만주 조선인(在滿洲朝鮮人) 아나키스트 연맹에 가입하여 이준근(李俊根) 이붕해(李鵬海) 이강훈(李康勳) 등과 함께 활동하다가 상해(上海)로 갔다. 1933년 8월 그곳에서 흑색공포단에 가입하고 옥관빈(玉觀彬)의 변절 행위를 묵과할 수 없어 그를 처치하였다.
그리고 상해남화한인청년연맹(上海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입하여 당원이 된 후, 일본공사인 유길명(有吉明)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
1935년 3월 25일에는 상해 조선인 거류민 회장인 이용로(李容魯)의 악질적 밀정 행위를 참을 수 없어 그를 총살하고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1936년 4월 24일에 경성복심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1938년 4월 9일에 사형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88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87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781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550 55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825·826·833·834·837·838·839·840·841·84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