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3권(1996년 발간)
그는 단발령(斷髮令)과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 등 일련의 국변을 맞이하여 의병에 투신하여 의병활동에 종사하였다. 그는 1896년 2월 윤석봉(尹錫鳳) 등과 유인석(柳麟錫)에게 격려문을 보내어 의병을 지원하였다. 그리고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됨으로써 한국이 일제의 준식민지(準植民地)로 전락하는 상황에서 1906년 5월 민종식(閔宗植) 의진(義陣)에 가담하여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전 참판 출신 민종식 의진은 충남 홍주에서 거의하여 홍주성을 점령하는 등 각 지역의 유생들이 가세하면서 한때 1천여 명이 넘는 규모를 이루었다. 이 때 유호근은 민종식의진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홍주성 점령후 이 의진은 일본군의 공격에 의하여 패퇴하였다.
의병 패퇴후 국권회복의 기회를 기다리던 그는 3·1운동이 일어나던 무렵 유림측에서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유림의 한사람으로 서명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세칭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이라고 불리우는 이 거사는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한 호서유림과 곽종석(郭鍾錫)을 중심으로 한 영남유림 137명이 참여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유림의 항일운동이었다. 파리장서의 요지는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광무황제(光武皇帝)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들 유림은 김창숙(金昌淑)을 파리로 파견하고자 상해로 보냈으나, 직접 가지는 못하고 이 문서를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했으며, 국내의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런데 이 일은 경상북도 상주의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1919년 4월 12일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宋晦根)이 붙잡히는 바람에 발각되었고, 이로써 유호근도 일경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들 유림이 한국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었으므로 민족적 감정이 더욱 번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137면
- 고등경찰요사(경북경찰부) 24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1권 35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2집 29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집 10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8권 935면
- 벽옹김창숙일대기(심산사업회) 9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