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19년 3.1운동 후
3.
4.
5. 1923년 부하
6. 1925.
7. 1926.2.18
(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1987년 발간)
1910년 국권이 일제에게 침탈되자 통분함을 참지 못하다가 1914년 남만주로 망명하여 각지를 전전하며 동지를 규합하다가 일단 고향으로 돌아왔다.
1918년 다시 만주로 건너가 유하현(柳河縣)에서 독립무장단체인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하여 군사훈련을 받고 제2대대장에 임명되었으며, 실전경험을 쌓기 위해 부하들과 함께 러시아 백군(白軍)에 참가하여 하얼빈(哈爾濱)에서 활동하였다.
그후 화전현에 돌아와 잠시 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1920년 봄에 조맹선(趙孟善)의 소개로 관전현의 독립단 교통부장 양기하(梁基瑕)를 만났으며, 1920년 8월 독립단이 광복군사령부로 확대 개편되자 이에 가입하여 제6대장이 되었다.
그는 임시정부와 밀접한 관련을 맺은 광복군사령부의 지시로 무장한 부하들을 인솔하고 국내에 진입하여 벽창의용단(碧昌義勇團)을 조직하고, 그 단장이 되어 평안도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였다.
즉, 1920년 8월에는 창성군 창주면 사창동에서 일경의 밀정을 총살하였으며, 그해 10월에는 부하인 김중관(金重寬)·곽상진(郭相鎭) 등을 거느리고 대동군(大同郡)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일경을 만나자 3명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또한 대동군 전촌(全村)주재소를 습격하여 일경을 처단하는 등 격렬한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에 따라 일경이 현상금을 내걸고 그를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자, 일단 관전현으로 되돌아 왔다.
1920년 일제의 만주 대학살사건 이후 독립운동단체들이 통합하여 1922년 대한통의부(統義府)가 조직되자 이에 가담하였으나, 통의부가 내분이 일어나 독립단계(獨立團系)인 유림파(儒林派)와 상해계열인 청년파(靑年派)로 분리되자 그는 이웅해(李雄海)·오동진(吳東振)·고활신(高豁信)·김승만(金承萬)·현정경(玄正卿) 등과 같이 민국파(民國派 : 상해파)에 속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동족간에 피비린내나는 혈투를 벌이게 되었으나, 1923년 1월에 이르러 겨우 타협이 되었다.
1923년초에는 상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벽창의용대 및 광복군대표로 참가하여 성명서 발표에 서명하기도 하였으나, 이 회의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동년 6월에는 관전현의 태평초 보민회(太平哨保民會) 지부장이며 일경 경부의 부친으로 악질 친일분자인 김용국(金用國)을 사살하였으며, 동년 8월에는 다시 국내에 들어와 창성군(昌城郡) 일대에서 군자금모집 활동을 하였으며, 일경을 만나는 대로 사살하고, 금융조합을 습격하는 등 관서(關西)일대에서 맹렬한 활동을 하다가 일경의 추적을 피하여 한동진(韓東振)과 같이 장춘(長春)으로 피신하였으나, 마침내 일 영사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로 압송되었다.
그는 결국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으며, 1925년 12월 4일 "구차하게 살고 싶지 않다"하고 상고를 취하하였다. 그의 부하인 한동진(韓東振)은 무기징역형을 받았으며, 그는 1926년 2월 21일 평양옥에서 교수형으로 사형 순국하여 창광산(蒼光山)묘지에 안장되었다. (서울현충원 위패봉안)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조선민족운동년감 179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54·471면
- 기려수필 291·297·298·299·315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132면
- 동아일보(1925. 9. 17, 9. 26)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260·67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86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932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88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299·309·31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30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