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3권(2017년 발간)
1910년 음력 12월 황해도 안악군(安岳郡)에서 안명근(安明根)의 독립운동자금 모집 계획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06년 안악 지역에서 최광옥(崔光玉)ㆍ김용제(金庸濟) 등 지역 유지들과 함께 민지계발(民知啓發), 산업증진(産業增進), 교육장려(敎育?勵)를 목적으로 면학회(勉學會)를 조직하고 서기를 맡아 활동하였다. 면학회에서는 1907년 면학서포(勉學書鋪)를 설립하여 출판 및 서점 사업에 착수하는 한편, 김구(金九)와 이광수(李光洙)를 초빙하여 양산소학교(楊山小學校)에서 사범강습회(師範講習會)를 개최하는 등의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서간도(西間道)로 이주했던 안중근(安重根)의 사촌동생 안명근이 무관학교(武官學校) 설립을 위한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음력 12월 국내로 들어와 자산가가 많이 거주하는 황해도 지역을 방문하였다. 같은 달 19일 안명근은 한순직(韓淳稷)과 함께 예전부터 친분이 있던 안악읍내의 원행섭(元行燮)의 집으로 가서 그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하였다. 이에 적극적으로 찬성한 원행섭은 그날 밤 양성진을 비롯해 박형병(朴亨秉)ㆍ고봉수(高奉守)ㆍ한정교(韓楨敎) 등을 불러 모았다. 이때 양성진도 안명근의 무관학교 설립 자금 모집 계획에 적극 찬동하여, 고봉수 등과 함께 안악읍내 자산가 현황과 헌병분견소(憲兵分遣所) 위치 등 지역 정보를 조사하여 안명근에게 전달하였다.
한편 이들은 김구ㆍ김홍량(金鴻亮) 등 안악 지역 애국계몽운동가들을 규합하여, 1910년 12월 20일 오후 11시 안악 교외의 남산(南山) 습락현(習樂峴)에 모여 거사를 일으키고자 계획하였다.
양성진은 당일 밤 11시경 안명근ㆍ원행섭ㆍ박형병ㆍ고봉수ㆍ한정교ㆍ한순직 등과 함께 권총 등을 휴대하고 습락현으로 갔다. 하지만 현장에 모인 인원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또 안악읍내의 자산가는 음력 12월이 지나야 거액의 현금을 소지할 것이라는 의견이 있어서, 이들은 거사의 실행을 음력 12월 15일(1911년 1월 중순)로 연기하였다. 그러던 중 이들로부터 자금 기부를 요구받은 민병찬(閔秉瓚)과 민영설(閔泳卨)의 밀고로 인해 1911년 1월 10일 안명근은 평양역(平壤驛)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를 계기로 일제당국은 이들의 무관학교 설립 자금을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 암살을 위한 군자금이라고 날조하여 관련 인사 160명을 일제히 검거하였다. 이른바 '안악(安岳) 사건', '105인 사건' 등으로 불리는 이 사건 과정에서 양성진도 동지들과 함께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1년 7월 22일 경성지방재판소(京城地方裁判所)에서 이른바 강도 및 강도미수(强盜未遂)로 징역 10년을 받고 공소했지만, 같은 해 9월 4일 경성공소원(京城控訴院)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고등법원(高等法院)에 상고했지만, 같은 해 10월 20일 기각되었다. 1912년 9월 13일 특전(特典)으로 징역 6년, 1914년 5월 24일 칙령 제104호에 의해 징역 4년 6월로 두 차례 감형되어 옥고를 치르고, 1915년 7월 18일 가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京城地方裁判所 : 1911. 7. 22)
- 判決文(京城控訴院 : 1911. 9. 4)
- 判決文(高等法院 : 1911. 10. 20)
- 朝鮮總督府官報(1915. 7. 27)
- 新韓民報(1911. 8. 9, 8. 16, 10. 25, 11. 15)
- 大韓每日申報(1905. 8. 11, 1907. 7. 23)
- 皇城新聞(1908. 1. 10)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별집 제1집 201~20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제11집 545~55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8) 제14집 805~812면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8) 제10권 667, 66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