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평남 대동(大同) 사람이다.
1919년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金祭面 院場里)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3·1독립운동 중 유혈참극의 하나가 되는 사천(沙川) 사건의 주동인물로 활약하였다.
이 투쟁이 일어난 현장은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江西郡 班石面 上四里) 였으나 그 발단은 금제면 원장리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는 당시 금제면에 합성학교(合成學校)를 설립하고 원장교회 전도사로서 민족운동에 선도적 역할을 해오던 중에 반석교회(盤石敎會)장로 조진탁(曺振鐸)이 평양에서의 3·1독립운동에 참여하고 독립선언서 몇 장을 소지하고 귀향하는 도중 원장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전하면서 합동거사를 결의하게 되었다.
1919년 3월 4일 사천장터에서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사할 때 그는 차병규(車炳奎)의 기도에 이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군중을 주도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만세운동준비 중 검속된 동지를 구출하기 위하여 헌병주재소로 향하였다.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나팔수들이 나팔을 불며 수 천명의 시위군중의 선두가 사천 장터 초입에 당도하였을 때 대기하고 있던 일제헌병들의 발포로 사상자 다수가 발생하였다.
이에 격앙된 시위군중은 일인 헌병주재소장과 보조원을 살해하며 격렬한 시위를 폈고 일경은 즉각 보복행동을 개시하여 무차별 검거선풍이 일어났다. 그는 사태의 위급함을 알아차리고 몇몇 주동인물과 함께 중국 동삼성(東三省)으로 피신하였는데 이해 8월 13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궐석재판이 열려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후 1933년 12월 중국 무순(撫順)에서 일경에 붙잡혀 대련(大連)을 경유하여 평양으로 이송되었고, 1935년 6월 10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살인미수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감형되어 8년여의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1935. 6. 10 高等法院)
- 日帝侵略下韓國36年史(國史編纂委員會) 第10卷 570·572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2卷 382·412面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4輯 909面
- 東亞日報(1934. 1. 21, 1935. 5.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