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8권(2010년 발간)
1919년 3월 7일 평북 철산(鐵山)에서 명흥학교(明興學校) 교장 심치규(沈致珪)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3월 1일 명흥학교 교사 안태영(安泰英)이 선천(宣川)에 갔다가 그곳의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하고 독립선언서 1장을 얻어 철산에 돌아왔다. 곧 그는 동료 교직원들에게 선천의 시위투쟁 상황을 설명하였고, 이를 계기로 철산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이 준비되었다.
심치경은 명흥학교 교장 심치규, 교사 안태영과 예수교인 김영락(金永洛)·안봉국(安奉國), 천도교측의 정구석(鄭久錫) 그리고 주민대표 김정찬(金鼎贊) 등과 동부동(東部洞) 유봉영(劉鳳榮) 집에서 3, 4차에 걸쳐 비밀회의를 열고 모든 준비를 협의하였다. 결국 거사일은 3월 7일 읍내 장날로 잡았고, 독립선언서의 인쇄는 천도교측에서, 태극기 제작은 그와 안봉국이 담당하기로 하였다. 마침내 거사 당일 12시경 예수교회에서 종이 울리는 것을 신호로 교인들과 주민들이 속속 예수교 교회당으로 모였다. 김영락의 사회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군중들은 교회당을 떠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며 시가행진에 들어갔다. 장 보러 온 수많은 사람들이 합세하면서 시위군중은 삽시간에 수천 명으로 불어났고 시위행렬은 군청 방향으로 행진하였다. 시위행렬이 우체국 앞을 통과할 때 그 안에 있던 일본인 직원들이 시위군중을 조소하며 욕설을 하자, 이에 격분한 군중들은 돌을 던지며 항의하였다. 이보다 앞서 일제의 철도원호대(鐵道援護隊)는 병력을 증파하여 삼엄한 경계를 하던 중이었다. 이들은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나자 시위행렬의 뒤를 따르며 해산을 강요하다가 투석전이 시작되자 실탄 사격을 가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로 인해 시위군중 중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심치경은 이날의 만세시위운동에 주도적으로 참가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5월 3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1919년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判決文(高等法院:1919. 7. 5)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제2권 440~442면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 鐵山郡誌(鐵山郡誌編纂委員會, 1976) 40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