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4권(2000년 발간)
경북 경주(慶州) 사람이다.
1919년 경북 대구(大邱)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옥고를 치렀다.
이곳의 만세시위는 영남지역 3ㆍ1운동의 효시일 뿐 아니라 이후의 영남지역 시위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곳의 시위는 이갑성(李甲成)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은 남산정교회 목사 이만집(李萬集)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 3월 2일 선언서를 전해받은 이만집은 김태련(金兌鍊), 김영서(金永瑞) 등과 함께 거사를 논의하고 오는 3월 8일의 서문외 시장 장날에 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을 세웠다.
당시 계성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손석봉은 심문태(沈文泰) 등 학생 대표들과 함께 만세시위 계획에 참여하여 거사를 준비하였다. 그를 비롯한 계성학교 학생들은 기숙사에서 비밀리에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마침내 3월 8일 서문외 장터에는 사전에 연락을 받은 기독교인을 비롯하여 계성학교, 대구고보, 성경학교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이만집이 준비된 임시단상에 올라 격려연설을 한후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학생, 시민, 장꾼 등이 독립만세를 화창하며 시위운동에 돌입하였다.
일본군 기마대와 경찰이 제지하려 하였으나 1,000여 명의 군중들은 일경을 밀어제치며 돌진해갔다. 시위대는 종로통을 지나 파출소를 돌아 달성군청(達城郡廳) 앞 삼각지까지 행진하였다. 이때 대구 주둔 일본군 80연대의 무력진압으로 많은 인사들이 부상을 당하고 시위대는 결국 해산당하고 말았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체포되어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5輯 1265·1271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9卷 269·271面
- 名籍表(大邱監獄)
-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