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5권(2020년 발간)
1919년 3월 서울에서 3.1운동을 경험하고 돌아온 장채남이 서성칠·윤학송 등에게 「독립선언서」를 보이고 서울과 기타 지방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의 정황을 전했다. 이들은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벌이기로 뜻을 모았다. 3월 22일 밤 ‘조선민족독립단 청진’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다. 23~24일 포항동(浦項洞)·신암동(新岩洞)에 배포하고, 25일 만세를 부르기로 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에게 선언서가 발견되어 경계가 강화되자 만세운동계획이 실패했다. 31일 정오 신암동에서 약 400명의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신암동의 청진헌병주재소, 경찰관파출소, 청진경찰서에서 헌병과 경찰이 출동하여 군중을 해산시켰다. 주도 인사 7명이 체포되었다. 해산했던 300여 명이 오후 3시 무렵 다시 집결하여 구금자 석방을 요구하며 만세를 불렀다. 4월 1일에는 포항동에서 만세시위가 이어졌다.
체포된 서성칠은 1919년 5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자, “자신의 행동은 조선민족으로서 정의인도(正義人道)에 기초해 의사발동한 것이므로 범죄가 아니다”라며 상고하였다. 1919년 6월 21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소요사건(騷擾事件)에 관한 도장관(道長官) 보고철(報告綴)(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내비보(內秘補):1919. 4. 15)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제5권 1048~104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