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1919년 3월 2일 용강군에서는 읍내와 진지동을 시작으로 크고 작은 규모의 무수한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3월 6일 정오 광량만에서는 1,000여 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벌이는 도중 일본 여자 한명이 욕설을 퍼붓자 군중들은 격분하여 그 여인과 한국인 순사보를 구타 응징하고 주재소로 몰려가 간판을 떼어내고 오후 2시경 해산하였다. 밤이 되자 40~50명이 주재소 부근에 집결하여 횃불을 올리며 다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평양에서 파견된 보병부대가 발포하여 1명이 죽고 7명이 다쳤다.
해운면 온정리에서는 3월 6일 주민 70여 명이 만세를 부르며 온정리 시내로 행진하였다. 만세시위대는 주재소로 몰려가 돌을 던져 유리창을 부수고 후퇴했다. 밤이 되자 40여 명의 시위군중이 부근 산중에 집결하여 주재소를 불사르고 인접지인 광량만까지 진격할 계획을 논의 하던 중 이 정보를 입수한 일본 경찰이 군대와 함께 급습하면서 1명이 죽고 1명이 다쳤다.
서동익은 3월 6일 용강군 용월면 대영리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 일로 3월 16일 마동경찰관주재소에 구금되었다가 진남포지청에서 평양지방법원으로 압송되었다.
서동익은 1919년 6월 5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 및 소요’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소요사건으로 처벌하는 것은 부당하고 사실적 이행은 조선민족으로서 당연한 것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영토를 잃은 민족의 상정(常情)인데 보안법 위반이라 하는 것은 일이 전도된 것이다”라고 상고하였다. 1919년 7월 26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1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고등법원:1919. 7. 26)
- 한국독립운동의 역사(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19권 235~23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