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3월 18일 오후 1시경 영해읍 시장에서 정규하(丁奎河)·박의락(朴義洛)은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장에 모인 군중은 일제히 여기에 호응하여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군중들은 다시 주재소로 몰려가 그곳에 걸려 있는 경찰복을 전부 찢어 버리고 비치되어 있는 대검과 총기 4정 및 탄약 87발을 압수하여 파기해 버렸다. 이날 밤 군중들은 밤새 만세를 부르면서 시내를 누비며 시위하였다.
3월 19일도 아침부터 만세시위는 계속되었고, 군중의 수는 점점 불어나 수천 명이 되었다. 영양군의 유지 이종구는 3월 19일 영해면 만세시위 연락을 받고 참가하기 위하여 수십 명을 규합하여 이동하던 중 신기동에서 같은 목적으로 영해로 가는 군중을 만났다. 그들은 지금 시간이 없으니 영해로 가는 것보다 창수동으로 가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자고 의견을 모았고, 150여 명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창수동으로 향하였다. 이들이 오후 4시경 창수동에 이르렀을 때 시위 인원은 400여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이들은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창수주재소로 몰려갔다. 곤봉과 도끼 등을 든 시위 군중들은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 닥치는 대로 사무실, 객사 및 주임순사 숙사(宿舍)의 벽, 천정 등을 파괴하고 각 건물 내에 두었던 주재소 공문서를 훼손하고 의자 10개 외에 잡품 약 4종을 파기하였다.
박학래는 1919년 3월 19일 창수주재소 앞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 및 공무집행 방해’ 등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1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대구지방법원:1919. 6. 5)
- 수형인명부(受刑人名簿)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제3권 431면
- 한국독립운동의 역사(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제20권 32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