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6권(2021년 발간)
1919년 3월 23일 강원도 화천군 화천면 신읍리(新邑里) 직동(直洞)에서 동지화동(東芝化洞)까지 천도교도 김창희(金昌羲)가 주도한 3.1운동에 참여했다.
3월 초 강원도 화천군 하남면(下南面) 논미리(論味里) 화천천도교구장 김준모(金俊模) 집으로 노병화(盧柄華)가 독립선언서 30매를 가져왔다. 이때 김희인은 독립선언서 1매를 받아 신읍리 집으로 돌아와서 부친 김창희에게 전달했다. 3월 21일 김창의는 이은규(李殷奎) 집에서 천도교도 박성록(朴成祿)・김용구(金容九)・한정종(韓丁鍾) 등과 회합을 갖고, 3월 23일 화천 읍내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했다. 또한 이은규의 장남 이달용(李達龍)이 ‘朝鮮獨立國萬歲’, ‘華川面民團代表者’ 가 적힌 깃발 2기(旗)를 제작하고 논미리, 상서면(上西面) 구운리(九雲里) 등에 만세운동 계획을 알렸다. 3월 23일 아침 화천헌병분견소 헌병들이 찾아 와서 김창희에게 동행을 요구했다. 이에 주위에 있던 인사들이 에워싸며 압박하자, 헌병들은 마을 끝자락으로 이동하여 분견소에 지원을 요청하고 상황을 관망했다. 김창희의 주도 하에 박성록이 독립기를, 김용구가 대표자기를 들고 약 20여 명의 주민이 함께 화천 읍내로 향했다. 여기에 직동(直洞) 물레방간 부근에서 한정종이 이끈 상서면 호동리(芦洞里) 주민들이 합세했다. 약 60여 명의 시위 군중이 동지화동에 이르렀을 때, 헌병들이 시위 군중을 제지하는 과정에서 충돌이 일어나 부상자가 발생했다.
김희인은 만세운동 참가로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1919년 4월 4일 화천헌병분견소에 구류되었다. 같은 해 5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공소를 제기했다. 7월 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 취소로 징역 8월을 선고받고 상고를 제기했으나 9월 20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28일 칙령 제120호에 의해 징역 7월 8일로 변경되었다.
정부는 202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判決文)(경성지방법원・경성복심법원・고등법원: 1919. 5. 28 ・ 7. 7 ・ 9. 20)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제2권 550~55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