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권(1986년 발간)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기독교(基督敎)인이다. 34세에 기독교에 입교한 후, 1913년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로 공주(公州)에서 포교활동을 하였으며, 1917년에는 평양 남산현교회(平壤南山峴敎會)로 전임되어 포교와 교육사업에 정진하였다.
1919년 2월 14일 기독교 북감리파 목사였던 그는 평양의 기홀병원(紀笏病院)에서, 동지규합을 위해 평양에 온 이인환(李寅煥)으로부터 3·1독립만세운동 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 호응하여 서울로 올라왔다. 2월 20일 이인환의 집에서 오화영(吳華英)·정춘수(鄭春洙)·오기선(吳基善) 등의 동지와 모여 서울과 각 지방에서 동지를 모아 일본정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키로 협의하고, 이인환·이필주(李弼柱)·박희도(朴熙道)·이갑성(李甲成)·오화영·최성모(崔聖模)·김창준(金昌俊)·신석구(申錫九)·박동완(朴東完)·양전백(梁甸伯)·이명룡(李明龍)·길선주(吉善宙)·정춘수 등의 동지와 함께 기독교측 대표로서 서명 날인하였다. 28일 밤에는 재동(齋洞) 손병희(孫秉熙)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만나, 이튿날 거행될 독립선언에 따른 최종협의를 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 등과 함께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인천(仁川)·원주(原州) 등지에서 종교활동과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무장독립운동비사 2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71·76·35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22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2권 385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96·97·103·147·148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75면
- 조선독립운동년감 2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1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566·56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1·14·18·20·28·39·41·44·46·50·51면
- 고등경찰요사 18·22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307·309·81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