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경북 김천(金泉)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월 8일 대구(大邱)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대구에서의 만세운동은 남산정교회(대구 제1교회) 유지인 이만집(李萬集)이 서울로부터 선언서를 전달받은 3월 2일부터 계획되어졌다. 이 때 만세운동은 기독교계의 인사들과 더불어 계성학교(啓聖學校)와 대구고등보통학교(大邱高等普通學校)·신명여학교(信明女學校)·대구성경학교 등 대구지역의 각급 학교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이들 각 학교는 처음에는 각기 만세운동을 계획해 갔으나 추진과정에서 서로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3월 8일 서문외(西門外) 장날을 기해 합동시위를 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들 학생들은 서울에서 보내 온 독립선언서와 함께 기숙사에서 태극기를 제작하면서 거사를 준비해 갔다. 그리고 거사 당일 거사 장소인 장터로 집결하여, 1백여 명의 계성학교 학생과 50여 명의 신명여학교 학생, 2백여 명의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가세하는 가운데 오후 3시경 미리 준비해 온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배포하면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이어 이들은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는데, 김봉안은 7, 8백 명의 시민과 함께 만세시위에 가세하면서 시위대의 규모는 1천여 명에 달했다. 이 때 일제는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일본군 80연대를 출동시켜 무자비하게 시위대를 탄압하며 1백 57명을 체포하였는데, 김봉안은 만세현장에서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6월 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집 1264∼127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9권 27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