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7권(1990년 발간)
전남 강진(康津) 사람이다.
경성사립국성중학교(京城私立國星中學校)를 졸업하고 강진군 사립학술강습소의 강사를 지냈다. 그후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중 소작문제에 자극되어 사회과학을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1932년 강진군의 소작쟁의를 주도하다 일경에 붙잡혀 1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 그는 1933년 전남운동협의회(全南運動協議會)에 가입하여 항일운동을 폈다.
전남운동협의회는 해남(海南)에서 김홍배(金洪培)·오문현(吳文鉉)과 완도(莞島)에서 황동윤(黃同允)을 중심으로 1933년 5월 14일 해남군 성도암(成道庵)에서 조직된 사회주의 비밀결사였다.
동회는 전남지역의 농민·어민·노동자·인텔리를 포함한 사회주의 운동의 통일적 지도기관을 목적으로 사무부·조직부·조사부·구원부의 조직을 갖추고 기관지로서 ≪농민투쟁(農民鬪爭)≫을 발간하였다.
이후 동회는 완도·해남·강진·장흥(長興)·영암(靈岩) 등의 지방에 53개의 농민반과 26개의 야경단, 28개소의 야학(夜學)을 설치하여 조직확대와 사회주의 사상의 보급에 힘썼다.
또한 장흥·해남·완도 등에서 10여 차례의 소작쟁의, 어업조합(漁業組合) 폐지운동, 강제연금 인출투쟁 등을 지도하여 다섯 차례에 걸쳐 목적을 관철하였다.
오원석은 1933년 11월 조정구(趙政九)·김호기(金浩基) 등과 함께 무산아동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교육하기 위해 개량서당(改良書堂)을 개설할 것과 강진군 동면(東面) 호안공사(護岸工事)의 임금인상을 위해 노동쟁의를 펼 것을 계획하던 중 1934년 2월 중순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1936년 12월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1936. 12. 28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10권 13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246면
- 조선일보(1934. 9. 7호외, 1936. 12. 31)
- 동아일보(1934.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