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19년 6월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7권(1990년 발간)
충남 논산(論山) 사람이다.
일찍이 고향인 논산의 각처에 개척교회를 세우며 전도사업을 벌였던 그는 1906년경 미국인 선교사 윌리엄즈(williams)를 만나게 되면서 공주(公州) 영명학교(永明學校)의 교사로 활동했다.
이후 그는 1915년경 서울에 올라와 이화학당(梨花學堂) 부속 여학교의 교사로서 교육사업에 종사하다가 3·1독립운동을 맞이하여 만세시위에 참가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독립운동을 구체적으로 전개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그 추진체로서 동년 5월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을 결성, 단장(團長)으로 활약했다.
이러한 대한독립애국단은 자생적(自生的)으로 생겨난 것이었으나, 결성 초기부터 상해(上海)의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와 연결되면서 임시정부 지원단체로서의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동단은 임시정부를 중심한 독립운동의 선전활동과 재정자금의 조달, 국내 조직망을 통한 임시정부 연통부(聯通府)의 역할 등을 수행했다. 동단은 본부를 서울에 두고 강원도·충청도·전라도 등지에 지단을 설치하고 있었는데, 그중 강원도단의 경우 속칭 철원애국단(鐵原愛國團)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그를 중심한 동단의 본부는 이무렵 서울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대동단(大同團)·대한민국청년외교단(大韓民國靑年外交團) 등의 단체와 교류를 통해 결속을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이들 단체는 1919년 11월 3·1독립운동과 같은 대규모의 만세시위를 연합하여 거행하기로 하고 이를 추진해 갔는데, 도중 대동단의 조직이 파괴당하고 신현구도 11월 20일에 일경에 붙잡혔다.
이로써 만세시위는 당초의 계획에서 크게 어긋나고 말았다. 그런데 이때까지 대한독립애국단의 조직이 발각되지 않았으나 1920년 1월 강원도단의 조직이 드러나면서 동단 조직 전모가 알려졌고, 이에 따라 그는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만기출옥 후에도 계속 항일운동에 참여하던 중 1927년 1월 잡지 ≪심경(心鏡)≫에 항일사상을 고취하는 글을 실었다가 다시 일경에 붙잡혀 징역 3년 6월형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말미암아 1931년 6월 17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판결문(1920. 12. 23 경성지방법원)
- 조선민족운동년감 44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231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76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66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447·990∼103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