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31년 조선혁명군 국내모연 특파원으로 평북
3. 1933년 5월 25일
4. 1934년 10월 9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사형판결을 받다.(1934.10.9 동아일보)
5. 1935년 2월 8일 상고기각(1935.2.8 동아일보)
6. 1935년 4월 30일 평양형무소에서 사형집행(1935.5.1 동아일보) (
- 교전(交戰) : 서로 병력을 가지고 전쟁을 함.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1987년 발간)
평남 중화(中和) 사람이다.
1924년 평양에서 평양점원상조회(平壤店員相助會)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르고 만주로 건너갔다. 1928년 5월 신안둔(新安屯)에서 개최된 3부 통일협의회와 유일당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후 동년 11월 15일 길성(吉城)의 동북에 있는 대둔(大屯)에서 정의부(正義府)·신민부(新民府)·참의부(參議府) 대표가 모여 국민부(國民府)를 조직하였는데, 이때 국민부에 가입하여 무장항일투쟁에 참여하였다.
1931년에는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국내모연특파원으로 평북 벽동(碧潼)지방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였으며, 적과 교전하고 피신하는 등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1933년 5월에는 조선혁명당 군사부 위원으로 다시 국내에 들어와 부하 김병한(金炳漢)·장일화(張一華) 등과 함께 5만원을 목표로 평남·황해도 일대에의 일본인 상가·금융조합 등을 습격하여 군자금 모집을 하다가 일경에게 탐지되었으나, 동년 6월까지 평안도와 황해도지방을 신출귀몰하게 오가며 일경의 비상망을 피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황해도와 평안남북도 등 3도의 경찰력을 총동원하여 연인원 3만여명이 혈안이 되어 추격하게 되니 약 2주일간의 피신극을 벌여 일인 순사부장을 사살하는 등 맹렬한 활동 끝에 1933년 6월 16일 마침내 체포되었다.
그는 결국 1935년 2월 8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동년 4월 30일 평양형무소에서 사형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909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54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800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65면
- 동아일보(1934. 10. 9, 1935. 2. 8, 5.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