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 3. 8 경북 (慶北) 대구부내 (大邱府內) 동산기독교성경학교생 (基督敎聖經學校生) 으로 대구계성학교생 (大邱啓聖學校生) 중심의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한 후 그날로 귀향하여 향리의 대리기독교회 (大里基督敎會) 에서 박락현 (朴洛鉉) 목사 (牧師) 외 2명과 의성읍 (義城邑) 장날을 기하여 거사키로 결정하고 태극기 100여매와 「대한독립」기를 제작하고 거사일인 동년 3월 18일 「장터」로 가서 태극기를 배부하며 독립만세를 고창 하고 시위하다 피체 되어 징역 10월을 받고 미결기간을 합산하여 10월 27일간의 옥고 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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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0권(1993년 발간)
경북 의성(義城) 사람이다.
1919년 3월 8일 대구(大邱)에 있는 동산 기독교성경학교(基督敎聖經學校)에 재학중 계성학교(啓星學校) 학생들이 중심이 된 대구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한 후, 고향인 의성군 금성면(金城面) 대리동(大里洞)으로 돌아와서 대리동 기독교회 목사인 박낙현(朴洛鉉)과 윤용구(尹龍九)·오상룡(吳相龍)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의성군 장날인 3월 18일을 거사일로 정하여 동지들과 함께 태극기 100여매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기를 만들고 인근 주민들을 규합하는 등 준비를 마치고, 이날 장터에 모인 수천명의 시위군중에게 태극기를 배부한 후 박낙현의 선창에 따라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를 전개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같은 해 4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고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3·1운동실록(이용락) 7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3권 382∼384면
- 판결문(1919. 4. 5 대구지방법원)
- 의원(항일독립운동기념탑건립위원회, 1991. 8. 15) 22·23·3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