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승려 출신으로서 일찍이 군대에 입대하여 1907년 군대해산 당시 하사였다.
일제에 의하여 군대 해산이 강행되자 다음과 같은 격문을 발하였다.
"아! 우리나라는 단군(檀君) 이래로 예의의 풍속과 공맹(孔孟)의 학문이 계계승승하여 충의와 효제(孝悌)가 천하에 으뜸하였다.
그런데 근일에 천도(天道)가 회명(晦瞑)하고 국운이 쇠퇴하여 적신(賊臣)이 권력을 농간하고 군자는 초야에 물러가게 되었다.
그러므로 최면암(崔勉菴)은 만리 해외에서 원통한 죽음을 당하였고 민충정은 한 칼 아래에 자결하였으며, 이 준(李儁)은 해아만국회의(海牙萬國會議)에서 분사(憤死)하였으니 이는 모두 국가 민족을 구제하려는 충성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한데 어찌하여 교목세신(喬木世臣)들은 각기 당파를 세우고 외적(外賊)을 맞아들여 해외에 망명한 역신을 귀국하게 하고 저 악독한 이등(伊藤)의 무리에게 국정을 맡겨 삼천리 강토를 적국에 내어주고 이천만 민족을 노예가 되게 하였으니 아! 천명(天命)인가, 운수인가 목이 메이는 바이다.…
하물며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충효를 숭상하여 왔으니 일이 절박한 이 마당에 있어 수수방관하는 것은 신자(臣子)의 도리가 아닌 것이다.
이 격문을 초고한 후에 만약 전일과 같이 태만할 때에는 마땅히 군법으로 시행할 것이니 뜻있는 동포들은 이 의거에 호응하여 대사를 이룩하게 하면 천만다행일 것이다."
이상의 격문을 사방으로 돌리고 해산 군인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키고 영남창의대장에 추대되었다.
그는 부장(副將) 홍병팔(洪秉八)과 부장(部將) 박원도(朴元道) 등을 지휘하고 의병 3∼4백 명을 통솔하여 봉화·울진·삼척 등 지역에서 일본군과 항전하였다.
그의 활동무대 일대에서 거의하여 같이 활약한 의병장으로는 민긍호·김덕제·이강년·조인환·허 준·이경삼·김만군·고석이·김군필·이한창·한기석·한갑복·윤기영·김생산 등이 있었다. 이들은 서로 격려하면서 유기적 관계를 맺으며 전략을 전개하였다.
1907년 10월 18일 오전 5시 성익현(成益鉉)·정경태(鄭敬泰)·변학기 등은 부하 5백 명을 거느리고 울진읍내의 경무고문분견소(警務顧問分遣所)를 습격하여 8시간의 전투 끝에 적을 물리쳤으며, 동년 11월 26일에는 삼척군 반생야(般生野)에서 적과 접전하였다.
1908년 3월 22일에는 봉화군 소천면(小川面) 석개리(石開里)에서 부장인 홍병팔이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변학기는 용기를 잃지 않고 부장 박원도와 더불어 태백산 북쪽 기슭인 천평이(川坪里), 영월, 성양(性陽), 덕구(德邱)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이즈음 변학기 의진은 이강년(李康秊) 의진과 연합하여 변학기는 그 좌군장(左軍將)으로서 활약하였다.
한편 일본군은 명산(明山) 소백산 중에 변학기 이외에 천여 명의 의병이 활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탐지하고 10여 개 지역의 수비대를 동원하여 엄밀한 경계망을 펴서 의병들에 대한 대토벌전을 전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묘히 몸을 피신하여 체포되지 않고 계속 항일전을 전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수비대의 지속적인 증원과 치밀한 토벌전에 걸려 마침내 체포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의병들의 항쟁 147·308·35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474·716면
- 대한민국 독립운동공훈록 597·59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574·61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