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경상북도 성주(星州) 사람으로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의 둘째 아들이다.
1926년 2월 민족 모욕을 일삼는 일본인 교원의 수업을 더 이상 받을 수 없음을 결의하고 대구고보(大邱高普) 3학년 학생 60여 명은 마침내 항일적 성격의 진정서를 교장 앞으로 제출하고 맹휴(盟休)에 들어갔다. 즉 무자격 교원의 사퇴, 학생에게 압박적 교훈을 함은 부당, 조선인은 야만인이라 하여 모욕적 언사를 항용(恒用)하는 것 등을 지적하여 혈서로 서명하고 혈인(血印)을 찍어 단결과 적극성까지 내보였다. 대구고보의 이 맹휴사건은 경상도 전역으로 파급되어 부산의 제2상업학교(第二商業學校), 동래고보(東萊高普)와 함께 진주(晋州)의 농업학교 진주고보(晋州高普)에서도 맹휴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1928년 1월 17일 그는 진주고보의 맹휴를 주도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일경(日警)에 체포되었다. 동년 4월 16일 공판에서 형집행이 무기 연기되자 미결수로 수감되었다. 학생맹휴운동이 극에 달하던 동년 7월에 진주고보에서는 일제에 대한 항쟁을 각 단위 학교에서 분산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동일한 항쟁대상에 대해 공동투쟁을 전개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앞서 김찬기가 주도했던 동맹휴학운동이 사전에 발각 체포되었음을 보완하는 방법으로도 몇 개의 학교가 연합하여 동맹휴학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때마침 진주농업학교에서도 연합맹휴에 적극 호응하였다. 두 학교에서는 내무, 외무, 조사, 경무의 4부를 조직하여 동년 7월 6일 오전 8시를 기하여 양교가 같은 내용의 요구조건을 제시하고 맹휴에 들어갔다. 그 내용은 조선 공학제(朝鮮共學制)의 폐지, 노예적 교육의 철폐, 조선어 시간의 연장, 조선역사 및 조선어의 교수, 교내 언론 집회의 자유보장 등이다. 이 사건으로 양교의 학생 1명씩이 주모자로 체포되어 먼저 수감되었던 그와 함께 실형을 선고받았다. 즉 그는 이들 연합맹휴사건을 배후에서 조종한 혐의와 함께 먼저 맹휴사건을 주도하려 했던 혐의로 1929년 11월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5년의 형을 받아 옥고를 치르다가 1931년 5월 출옥하였다.
출옥 후 그는 왜관(倭館)으로 활동지를 옮겨 청년연합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39년 2월 이른바 왜관사건에 관련된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1941년 3월 보석(保釋)으로 가석방되었다. 거주지를 대구로 제한하여 표면상 일체의 항일활동을 중지한 상태로 지내다가 1943년 12월 일경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연안으로 망명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으나 탈출하여 중경(重慶)으로 갔다.
그가 망명할 무렵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사천성기강(四川省 江)에서 중국정부를 따라 중경으로 이전하여 헌법을 개정하고 국무위원을 개선하며 한국광복군 총사령부(韓國光復軍總司令部)를 설치하여 체제를 재강화하는 등 조국 광복을 위한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도 새로운 체제의 임시정부에서 항일운동을 위한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광복되자 환국 준비를 하던 중 동년 10월 12일 중경에서 영면하였다.
그의 서보(逝報)를 듣고 정인보(鄭寅普)는 다음과 같은 만사(輓詞)를 지어 애도하였다.
『가기를 엇지 간고
萬里 가 刀山劍水
玉도곤 귀한 선비
계서 고만 흙이라니
안 「헤저」 다시 온단들
뉘라 긘줄 알리요.』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형사사건부
- 광명일보(1946. 10. 11)
- 동아일보(1928. 4. 16, 7. 7)
- 조선동맹휴교의 고찰(총독부경무국) 111 112면